“프랑스가 스스로를 표현했다.” 전후 세대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대통령에 선출된 니콜라 사르코지는 결선에 오른 뒤 이렇게 포효했다. 당선되고 나서는 “모든 프랑스인의 대통령이 되겠다”며 우리 모두 역사의 새 페이지를 쓰자고 외쳤다. 첫 여성 대통령에 도전한 루아얄은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야만성 없는’ 개혁이 가능하다며 유권자 가슴에 파고 들어 차기를 도모하게 됐다.

2008년 대선을 앞둔 미국에서는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열풍을 뿜어내고 있다. 그는 민주당 경선에서 최강자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과 각축 중이다. 혹독한 검증 과정과 여론 심판을 앞두고도 거침없는 행보다. 자서전 ‘나의 아버지가 준 꿈들’과 ‘희망이 주는 대담함’은 오바마의 신화를 읽는 키워드다. 미국인들은 “이 지구상 어떤 나라에 간들 가난한 케냐 유학생의 아들인 내가 이처럼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한마디에 일단은 매료돼 있다.

두 나라의 선거 축제를 관전하며 갖가지 엉켜들 나라가 있다면 아마 영국일 것이다. 퇴임 초읽기에 들어간 토니 블레어 총리가 “임기 초기에 개혁 정책을 추진하면서 방향을 제대로 못잡고 머뭇거린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가디언 보도)고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집권 뒤 3년을 낭비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국정 최고 책임자의 귀거래사를 듣는 대영제국 후손들의 심사가 어땠을까.

우리야말로 당혹스럽고 절박한 처지다. 정치 선진국에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최근의 정치 기상도는 수많은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념이나 노선, 정체성은 오간데 없고 대권이라는 제로 섬 게임만이 전개되고 있다. 여권 실종이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 7개 정파 10여명의 주자, 이른바 범여권의 카오스적 정치 행태가 어지럽다. 제3지대 통합론등을 기치로 후보를 단일화한 뒤 표를 달라겠다는 로드맵은 당당함인가, 뻔뻔함인가. 교과서에도 없는 민주주의를 강요하는 셈이니 자녀들에게 민망할 지경이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집권당’이 된 한나라당 역시 중증이다. 두 유력 주자는 정권교체라는 명분이나 지지자들의 여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다. 누가 나서든 승리할 수 있다는 여론조사는 경선 룰과 관련한 두 캠프의 대립을 이전투구로 만들어버렸다. 재보선 결과가 던지는 교훈을 새기려 들지 않는다. 그들의 네거티브 캠페인은 글로벌 시대의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다.

대통령학의 권위자인 제임스 바버는 대통령의 직무수행 스타일과 리더십 유형을 4가지로 분류했다. 이상적인 것은 활동 긍정형이다. 이들은 일을 즐기며 국가에게도 유익하게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수동 부정형이 최악이라면 오답이다. 국민이 가장 불행한 것은 활동 부정형의 대통령을 선출하는 경우다. 추구하는 정책을 타협할 수 없는 가치로 믿는 이 유형은 정치적 영향력과 지배에 가장 관심을 둔다. 바버의 이론을 우리 정치 시간표에 대입해보면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 결론이 나온다. 내년 총선 때 반대파에 대한 공천 배제다. 임기 초반 그런 일로 힘을 빼버리면 블레어 총리처럼 후회하게 되고, 국가적으로도 불행하게 된다.

언론에서는 프랑스 대선에 대해 파리지앵들이 시장과 세계화를 선택한 것으로 분석한다. 구체적으로는 성장과 친미 노선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이 진실로 차기 대통령에게 기대한 것은 비전과 꿈, 애국심 이런 소박한 것이 아니었을까. “더 벌기 위해 더 일하자”는 말보다 신선하고 호소력 짙은 구호는 없다. 미국인들이 오바마에게 환호하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그런 후보를 찾아보기 어렵다. 함께 손잡고 새 세상을 만들자는 메시지를 아무도 전해주지 않는다. 메시아적 제왕 흉내를 내거나 아니면 ‘실패한 대통령’의 훈수를 자초하는 비루한 모양새다. 이러다가는 올 대선에서도 ‘한국을 스스로 표현’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나라를 책임지겠다는 후보들의 대답을 기다려야겠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호사스런 질문으로만 느껴진다.

송신용<정치행정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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