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저명한 19세기 사상가 존 러스킨은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나쁜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사람이란 누구나 게을러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사람이란 본능적으로 잔인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동문학가 소파 방정환은 잠들어 있는 어린이는 천사와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 천사 같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잔인한 본성이 조금씩 드러난다. 기어가는 개미를 밟아죽이기도 하고 잠자리를 잡으면 날개를 뜯어버리고 때로는 머리를 비틀어 놓기도 하는 등 잔인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한다. 600만의 유태인을 학살하고도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던 히틀러의 피가 바로 인간의 그 피가 아닌가. 사람 많이 모이는 곳을 노리는 이라크의 폭탄 테러범도 꼭 같은 잔인무도한 인간임에는 틀림이 없다. 돈 때문에 남의 집 어린아이를 납치, 감금하고 그 부모에게 거액을 요구하다 돈을 받기도 전에 그 애를 죽여버리는 흉악범도 한둘이 아닌 오늘의 세상이다. 그런 악한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한국에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에 미국 버지니아의 한 대학에서 학생과 교수를 합하여 32명의 죄 없는 사람들을 순식간에 쏘아 죽인 자는 사람인가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인가. 그런 악마가 한국 국적을 가졌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민망하게 만든다. 그 사건 직후 범인은 아시아계인 것 같다고 보도가 될 때부터 우리는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백인이다 흑인이다 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계라고 할 때 혹시 한국인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뒤에 중국인인 것 같다고 보도가 되었을 때, 그것도 괴롭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국인이 아닌 것만은 천만다행이라고 여겼는데 정식 발표가 나오는데 보니 그 범인은 한국학생이라는 것이었다.

“어쩌다 이런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신문의 1면이나 TV의 뉴스를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주체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200만도 더 되는 한국동포가 미국 땅에 살고 있다는데, 그리고 그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는데 그들은 이제 무슨 낯으로 미국사람들을 대하게 될 것인가. 미국에 도착하여 입국심사를 받고자 이민국 직원 앞에 여권을 내줄 때 ‘국적-한국’이라고 쓰여진 것을 보고 그는 입 밖에 내서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는 “흉악한 살해범 조승희와 같은 국적이구나”라고 생각할 것 같아 미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 조군은 정신질환에 시달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 근본은 열등의식이었을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히틀러도 무솔리니도 모두 그런 열등의식 때문에 엄청난 범죄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학설도 있다.

어쨌건 이 엄청난 불상사 앞에 우리는 할 말을 잊었다. 슬퍼만 하고 통탄만 할 일은 아니다. 이 불상사는 전 세계에 한결같이 주어진 고통인 동시에 한국인에게 주어진 시련이요 도전이란 생각이 앞선다. 이 사건 하나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세계가 가야할 새로운 길이 열릴 수도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것을 새로운 인류의 활로를 개척하는 하나의 계기로 삼아야만 한다. 대통령은 물론 여야의 모든 지도자들이 우선 반성하고 각성해야 한다. 과거 왕조시대에 천재지변을 당하면 임금은 몸에는 베옷을 감고 머리에는 재를 이고 자기 자신의 덕이 부족함을 하늘을 향해 자백하면서 “과인의 탓이로소이다”하며 통곡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임금의 자세가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진 것도 사실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번에 벌어진 참극이 나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민족으로서 도덕적 재기의 기회를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윤리적 반성은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 속하는 것인데, 우선 지도층부터 이번 참사로 크게 충격을 받은 모든 유족들을 위하여 적어도 수입의 10분의 1을 기금으로 내놓아야 한다. 그런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면 지도자도 살고 국민도 산다. 노무현도 살고 대한민국도 산다.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 역사에 벌어지지는 않는다. 이런 하늘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 겨레가 계속 멋대로 나가면 우리 앞에는 멸망이 있을 뿐이다. 지도층을 포함하여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기금 10조만 마련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국제사회에서 우뚝 서는 민족이 된다. 이 나라의 기업가들 중에는 곤경에 처하여 또는 압력에 못 이겨 선뜻 8000억을 내놓은 기업도 있고 1조를 내놓은 기업도 있으니 기금 10조가 결코 허망한 꿈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런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여야가 뭉칠 수만 있다면 17대 대통령선거도 공정하게 치러질 것이고, 가진 자와 못가진 자들 사이에 위화감도 많이 해소가 될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우뚝 설 수 있다. 태극기를 높이 들고 한데 뭉치자. 뭉쳐서 전진하자. 영광스러운 조국의 내일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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