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을 말한다 - ‘대전 언론계 산증인’ 윤종서 전 대전일보 사장

비록 현직에서 물러났지만 후배들의 기억에 오래 남아 귀감이 되는 사람이 있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센티미터 광고를 도입하고 여러 차례 경영혁신을 일으켰던 사람. 지역 언론계는 그를 총무국 사원에서 사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또는 영원한 신문쟁이로 기억하고 있다. 신문의 날을 맞아 대전지역 언론계의 산증인인 윤종서 전 대전일보 사장을 만나 지역언론의 역사와 현실,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들어본다.

윤 전사장은 칠순을 훌쩍 넘기고 대전일보를 퇴직한 지 만 5년이 지났지만 곧고 선비같은 기품이 엿보였다. 그는 후배들을 만나자 마자 불쑥 한마디 던져놓고 시작했다. “뭘 말하려고 만나자고 하나. 신문에 대해서는 김국장이 더 잘 알지 않나”. 그의 말투에서 여전히 언론인으로의 자존심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할말이 있는 듯 했고 묘한 긴장감 마저 들게 했다.

-지역신문의 역사와 대전일보의 태동에 대해 얘기해 달라.

▲지역신문에 대해서는 직접 체험해서 아는 부문이 있고 들어서 아는 부분이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시대 중선일보가 있었는데 광복후 좌익계가 인수해 중앙일보 등의 제호로 나오기도 햇다. 컬프 충남지사가 좌익계 신문을 인수해 동방신문으로 바꾸고 곽철수씨가 운영을 맡게 했다. 대전의 유일한 신문사였던 동방신문은 6.25 폭격으로 완전 소실되고 곽 사장도 목숨을 잃게 됐다.

동방신문이 타버리고 난후 대전에도 버젓한 일간신문 하나 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소망이 신문인과 지역민들 사이에 싹트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바람은 결국 대전일보를 탄생하게 했다. 당시 충남도청 공보과장 임지호씨가 주축이 돼 그 당시 2페이지를 발행할 수 있는 활판기를 사용해 신문을 만들었다.

-대전일보의 첫 발행일이 과연 언제인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할 것 같은데.

▲대전일보가 정부로부터 정식등록을 받은 날인 1950년 11월11일을 첫 발간일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그렇지 않다. 첫 신문은 1950년 10월 3일 발행됐는데 삐라형의 16절지 크기의 전시속보판이다. 그때 신문이 매우 잘 팔렸다고 한다. 라디오도 TV도 없었고 궁금한게 있으면 신문을 봐야 했다. 대전일보 창간 다음해인1951년 8월 24일 대전에는 또 하나의 신문사인 중도일보가 발간됐다.

-언론계에서 그것도 대전일보에서 한우물을 팠는데 얼마동안 근무했나.

▲59년 10월 12일 입사해 2002년 4월 11일까지 43년간 대전일보에 몸담았다. 총무국 사원으로 출발해 총무부장, 영업부국장, 출판국장, 광고국장, 서울지사장, 이사, 상무, 사장을 지냈다.

-40여년 근무기간동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어디서 근무하든 애사정신이 있어야 한다. 주인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돌이켜 보면 회사를 생각하지 않고 개인만 생각했다면 2년만 했으면 평생 먹을 것 챙길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1970년대 광고를 일대 쇄신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도장을 개인이 가지고 다니고 계산서도 없을 때였다. 도장 회수하고 업종별 단가표를 만들었다. 1973년 영업부국장 시절 신문 1행당 계산하던 광고비를 센티당 단가로 전환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센티미터 광고의 효시다.

그때는 개인은 부자되고 회사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호통을 치고 서류를 던져가며 일했다. 그때 모두 직영 체제로 돌렸다. 그 다음 1974년 서울지사를 직영했는데 이 또한 전국에서 전국에서 처음이다.

-정론직필의 길은 고난을 불렀다. 대전일보가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국세청 본청의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75년 5월 15일자로 국세청 본청에서 3륜차로 한트럭분의 제반서류를 압수해 갔다. 그때 양복쟁이가 정문에 딱 서있었는데 국세청 본청에서 왔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신문사에 부임인사를 온 줄았는데 서랍을 열어 메모쪽지 한장까지 다 가져갔다. 이것이 사찰의 시작이었다.

마포경찰서 뒤 양조시험장 3층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때 조사 책임자가 빨리 정치적으로 해결하라고 했다. 홍성사람 권 아무개가 이런 규모 가지고 본청 사찰 있을수도 없고 빨리 정치적으로 해결하라고 거듭했다. 본청 세무사찰을 3개월동안 받고 또 3개월동안 지방청 실사를 받았다. 그때 3000여만원을 추징당했다. 유신시절 신문보도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중도일보를 매입함으로써 중부권 최고 최대의 신문이 됐다. 매입 과정등 당시를 회고한다면.

▲73년 3월 25일자로 중도일보를 완전히 인수했고 그때 인수 작업에 참여했다. 이미 김동순박사(충남 당진출신, 전 서울대치과대학장)가 중도일보를 매입한 상태였고, 대전일보는 김박사와 1972년 7월 10일 양도양수계약을 적법하게 체결했다. 그러나 이웅렬 전중도일보 사장이 7월 20일 계약 효력정지신청을 대전지방법원에 제출하면서 공방이 시작됐다.

쌍방의 엇갈린 주장속에 법정싸움은 중도일보가 소를 취하할때까지 계속됐다. 당시 중도일보의 입장을 고려해 제호를 충남일보로 바꾸고 73년 5월 25일부터 발간하게 됐다. 중도일보는 5월 24일자 종간판을 내면서 문을 닫았고 대전일보도 중도일보의 종간사를 실었다. 그때 이 사장도 충남일보의 이사로 2년간 재직했다. 중도일보의 체면을 세워주고 나중에 다시 대전일보로 제호를 환원한 것이다.

-사실관계가 이렇게 분명한 데도 중도일보 통합을 두고 항간에 오해가 있는 것으로 안다. 일부에서는 5공 군사정권의 강제 통폐합이라고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전달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부문이 있는 것 같다. 시민들이 시간이 흘러 통폐합 과정을 잘 모른다. 일부는 80년대 통폐합된 것으로 아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신군부 시대 매일신문과 영남일보, 부산일보와 국제신문이 통합된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대전일보가 경영난에 처해 있던 중도일보를 인수 합병한 것이다.

-40여년간 근무하면서 제일 힘들었을때는 언제인가.

▲IMF외환위기때가 가장 힘들었다. 외환위기는 경영진이 부른 건 아니지만 수입이 3분 1로 줄어 들었다. 외횐위기 이후로 회사사장이 42일동안 공석이었다. 그 때 아무도 사장을 맡지 않으려고 했는데 43일만에 승락했다. 사원들이 동참의식을 가졌다면 어려움을 슬기롭게 벗어낫을 수도 있었다.

1989년 노사분규로 22일간 신문발간이 중단됐던 때도 어려웠다. 판매는 물론이고 광고손실이 어마어마했다. 결국 그것을 다시 회복하는데 29억원 가량 빚을 내야 했다. 광고를 다시 개척하는 것이 힘들었고 근 6개월동안을 돈을 받지도 못했다. 이런 것이 큰 고통이었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주인의식이 있어야 한다. 대내적으로 여건이 어렵다. 전직원이 회사를 홍보하는 홍보요원이 돼야 한다. 밖으로 사실과 다른 얘기가 나와서는 안된다.

-신문의 미래에 대해.

▲신문시장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 지고 있다. 신문보급 배가 운동에 전사원이 동참해야 한다. 신문보급은 관리자 몇명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사원이 자기역할을 해야 한다.

-신문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나.

▲똑같지 뭐 생각이 허허...지방신문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중앙지라고 부르는 신문들은 서울에서 나는 신문 아닌가. 우리 신문, 지방신문에 대한 애정을 갖도록 만들어야 한다. 시민들의 품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신문, 가려운데 긁어주는 대변인이 돼야 한다. 전사원이 홍보요원화 해야 하고 지역사회의 소금역할을 해야 한다. 결국 시민의 대변자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정리=은현탁·사진 빈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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