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방문 길의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그곳 교민들과 만난 자리에서 엉뚱한 한마디를 던져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4년 넘게 대통령 자리에 있으면서 참으로 ‘놀랄 만한’ 발언을 끝없이 하여 한국 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노 대통령은 공식석상에서 “대통령 노릇 못해먹겠다”라는 내용의 말을 한 번도 아니고 12번이나 되풀이하였다는 것은 진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런 엉뚱한 말이 대통령직이라는 어마어마한 자리에 올라서 어떤 기회에 한 번만 털어 놓았다면 “얼마나 그 자리가 힘들면 저런 넋두리가 그 입에서 나왔을까”하며 동정하는 시민들도 없지는 않으련만 마치 입버릇처럼 여기저기서 그 말을 내뱉으니 이제는 동정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고 오히려 실없는 소리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정 못하겠으면 그만둘 일이지 왜 반복하여 저런 소리를 하나”라며 매우 못마땅해 하는 것도 사실이다.

대통령직이란 어느 나라에서나 간접적이건, 직접적이건 선거를 통하여 선출되는 자리이고 대통령이 되겠다고 입후보하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는 일은 대통령 자신에게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한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초등학교의 반장으로 당선된 아이도 임기가 끝날 때까지는 반장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한 나라의 국가 원수가 어떻게 감히 국민 앞에 “못해먹겠다”라는 말을 되풀이할 수 있단 말인가. 대통령도 사람인데 쌍소리도 하고 막말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노 대통령을 두둔할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뒷골목의 주먹 패처럼 ‘막가파’가 돼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는 것이다. 대통령에게는 대통령으로서의 품위가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버릇이 그런 사람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한국인 전체의 품위가 하향 조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 아닌가.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지난 4년 남짓 노 대통령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의 교민들 앞에 던진 한마디는 우리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우리가 살려면 친미도 하고 친북도 해야 한다”라는 그 한마디는 진실로 충격적이다. 하면 다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해서 될 말이 있고 해선 안 될 말이 있다. 그의 입에서 “친미”라는 말이 나온 것은, 그것도 긍정적인 의미에서 그 한마디가 나온 것은 그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뒤 처음 나온 말이요 과거에는 코드가 안 맞는 사람 또는 그의 마음에 안 맞는 사람들을 친미·수구세력으로 싸잡아 후려갈기던 그가 친미하는 사람들도 매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의 발언으로 받아들인다면 매우 놀라운 전환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의 입에서 번번이 던져진 한마디는 “반미가 뭐가 나쁩니까”라는 것이었지 “친미가 뭐가 나쁩니까”라고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사실이 놀랍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기억 속에 노 대통령이 줄곧 친북을 부르짖은 사람이기 때문에 친북이라는 그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조금도 놀라울 것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살기 위해 친미도 하고 친북도 해야 한다는 그의 발언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까지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명제이다. 오늘의 국제정치의 현실 속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한국을 완전히 고립시키기 위해 혹시 “반미·반북”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친미·친북”은 오늘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지난 2월 13일 북경에서 열린 6자회담을 통해 작성된 합의문에 따라 북은 핵을 포기하고 미국은 모든 금융제재를 풀어주고 부시와 김정일은 서로 껴안으면서 미국과 북의 인민공화국이 국교를 정상화하는 동시에 동북아의 항구적 평화가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 마음에서 노 대통령이 “친미·친북”을 부르짖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러나 한국 사람인 내가 듣기에도 그의 친미발언은 신빙성이 없다. 내가 보기에도 “친북”을 위장하기 위하여 “친미”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짙다. 국제정세의 오늘의 상황은 친미와 친북이 공존할 수 없다. 성서에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라는 한마디가 있다. 우리가 친미를 힘쓰면 북이 얼굴을 찌푸릴 뿐만 아니라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대한민국을 못살게 할 것이다. 우리가 친북을 표방하면 잔뜩 금이 간 한미관계는 영영 회복되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초등학교 아이들 사회에서도 상식화된 논리이다. 한 나라를 이끌고 나간다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한심한 발언을 하고도 태평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가. 그렇게는 안 된다.[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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