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의 소도시에서 제법 성공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K씨는 통일되기 전 서독에서 광부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다. 부인 역시 서독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 그와 결혼했다. 이역만리에서 눈물겹게 돈을 벌었던 당시의 역경들을 밑거름으로 현재의 위치에 오르게 됐다고 그들 부부는 말한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리의 노동자들에게 서독인들이 보여준 배려와 인류애였다. 물론 우리의 노동자들을 `원시인`정도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존재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시민들은 따스한 온정을 전하는 아군이었다고 한다.

독일이 보여준 배려와 인류애

그들은 사진에 취미를 붙인 K씨를 적극적으로 동호회에 가입케 하고 직간접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수년후 그는 통역관 겸 사진전담요원으로 1974년 뮌헨올림픽에 참여해 한국선수들의 활약상을 세계에 알렸다. 당시 서독인들은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피부색 다른 부부가 자국민들과 다른 대우를 받는 것에 분노했으며, 부당한 일이 자행되는 것을 부끄러워 했다. 그릇됨을 고치기 위해 지방정부에 항의를 하는가 하면 정치적 압력을 행사했었다고 K씨는 기억한다. 통독후 나치를 외치며 외국인 노동자들을 못살게 구는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지만 K씨 부부는 "독일· 독일인은 `좋은 나라`·`신뢰할 수 있는 국민들`"이라는 믿음을 저버릴 생각이 없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타국으로 나간 지 수십 성상이 지났다. 우리의 청년들이 4D(기존의 3D에 distance의 개념이 포함)업종을 기피하게 됐고, 세계각국의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 지 오래다. 그렇지만 외국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계속되고 있으며 공적인 보호체제 역시 극히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외국노동자의 어려움은 고학력이나 고급인력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고려인 동포과학자 김경창 박사는 사할린에서 초중고를 졸업한 뒤 러시아의 톰스크 공대와 타슈켄트의 원자력연구소에서 근무한 우즈베키스탄의 존경받는 과학자였다. 2001년 한국원자력연구소 초빙과학자로 대전과 연을 맺었고, 해외과학자 장기채용지원사업이 시행되면서 방사선 조사물리학을 우리측에 전수하는데 힘써왔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업무를 수행하던 그가 최근 간암으로 숨지자 부인과 지역대학에 다니던 딸에게는 악몽같은 현실이 엄습했다.

인간존엄은 모든 것에 우선

병원비를 감당하느라 재산이 소진되었지만 퇴직금이나 연금은 없었다. 생활해왔던 연구단지 공동아파트에서도 퇴거를 종용받았고 강제출국 일보직전까지 갔었다. 가장을 잃은 것만도 슬프고 아득한 판에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길바닥에 나앉게 된 셈이다. 다행히 대전일보의 보도와 한국원자력연구소직원들의 모금 등에 힘입어 다소간 생활에 안정을 기하게 됐지만, 그렇게 될 때까지 우리의 법적·제도적·행정적 개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규정이 없기 때문에" 공적이며 체계적인 복지적 개입은 할 수 없었다는 관계당국의 설명만이 뒤따랐다. 누가 봐도 도움과 개입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긴급·비상체제는 작동하지 않았다. 힘들고 절박한 순간, 반드시 도움과 배려의 손길이 요구되는 바로 그 싯점에서 우리의 공적기제는 작동을 멈춘다. 어려운 사람을 더욱 더 나락에 빠지게 하는 가학적인 시스템이다. "자국의 연구원이었더라면 저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 "이러고서도 대한민국이 세계화를 운운하는가"라는 질책은 결코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건강한 제도와 시스템은 어렵고 긴박할수록 빛을 발한다. 절망적인 순간 피부색이나 국적을 이유로 공적인 개입이 멈춰지거나 지연돼서는 안된다. 인간존엄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지원과 배려는 그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마땅하다. 유연하고 탄력적인 사고와 제도운영을 주문해본다. 오늘 또 내일 우리는 또다른 김 박사와 마주해야 할 것이다. 한국과 한국인이 `정의로운 나라`·`따뜻하고 넉넉한 세계시민`으로 자리매김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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