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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와 법관

2007-01-22기사 편집 2007-01-21 13: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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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였다. 10년 넘게 복직투쟁을 했다. 끝내 재판에도 졌다. 패소판결을 내린 판사의 귀가를 기다렸다가 석궁을 쐈다. 전직 교수의 현직 법관 습격사건이다.

교수의 전공은 수학이다. 논리가 주된 방법론인 학문이다. 법관은 법리를 설파하여 죄를 논한다. 둘 다 일맥상통하는 직업인이다. 이성을 먹고 산다. 법정에서의 조리있는 판결문이 전직 교수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설혹 머리는 승복했을지 몰라도 가슴은 이게 아니어야 했다.

교직에서 쫓겨난 원인의 제공은 본인이 했다. 학교측은 그걸 빌미로 재임용을 하지 않았다. 법원은 제3자의 입장에서 판가름한다. 그 결과 학교의 손을 들어 주었을 뿐인데 당해야 했다.

보복을 하려면 학교를 상대로 했어야 했다. 학교에서 그만두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학교가 아니라 법원을 표적으로 했다. 소송을 건 행위는 이성적이었지만 판결에 대한 대응은 비이성적이었다. 물론 보복 자체가 인정되는 시대가 아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응보는 옛날 제도이며 원시감정이다.

그럼에도 분노를 표출한다. 복수한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교수였고 지금은 백수라도 사람이다. 내 생사가 걸리고 이해득실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아닌 척하기는 힘들다. 먹고 살아야 하는데 무심할 수가 없다.

필자는 교수 세계에 발을 담근 지 갓 3년이다. 잘 모른다. 사람 만나길 썩 좋아하질 않으니까 접촉도 드물다. 그래도 듣기는 많이 듣는다. 일부러 경청해서가 아니다. 그저 들려 온다. 그쪽에 계시니 이런 일도 좀 아셔야 한다며 얘기해 준다. 개중에는 설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생각되는 예도 있다.

석사학위를 받은 후로는 논문을 쓴 적이 없다. 표절이니 뭐니 하는 시비의 대상이 될 여지가 전혀 없는 셈이다. 실무 경력으로 강단에서 버틴다. 새삼 이론적으로 깊이를 더할 처지도 아니다. 미국과 일본의 월간 전문지는 세 종류를 본다.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할 때 잘 써 먹는다. 정곡을 찌른 문구도 있어서 참 멋지다며 자주 활용한다. 모르는 사람은 내 생각으로 여긴다. 굳이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 그냥 넘어간다.

강의안을 학교 인터넷에 올려 놓았다. 방학이 되면 수정을 시도한다. 글로 써서 올린 텍스트와 그걸 토대로 강의실에서 말로 하는 내용과는 사뭇 딴판이다. 물론 큰 흐름과 대강의 뜻은 같다. 그러나 순서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다. 사례가 보다 신선한 케이스로 대체된다. 학기가 끝나면 글과 말의 일치가 과제로 대두된다. 입수된 새 법령과 새 통계로 보완도 해야 한다. 최신형으로 고급화하고 싶다. 당연한 욕심이다.

생각처럼 되지를 않는다. 매년 그냥 옛것 가지고 들어간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노트북을 매일 켜 놓는다. 수정하기 위해 메모해 놓은 최근 자료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거기에 미국의 신간서적 몇 권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하루 몇 쪽이 고작이다. 이 메모 쪽지 들고 가서 필기하게 하면 되지 하면서 세월을 보낸다.

나와 같은 교수와 내가 듣게 된 교수와 같은 유형은 극소수라 본다. 또한 전하는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보거나 겪은 건 아니다. 함께 하는 교수를 보면 그런 사람 없다. 좋은 환경이구나 한다. 모두 열심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리터엉’ 교수가 아닌가 한다. 열심히 해도 학생들이 교수평가에 비 플러스만 주니까 말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에이 플러스도 많이 주는데 말이다.

교수와 법관. 자격이 공인된 전문직업인이다. 교수 되기가 어디 쉬운가. 최소한 박사학위가 있어야 한다. 법관은 아무나 될 수 있는가. 사법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둘 다 지성인이다. 사회를 앞장서서 이끌어 나가는 양식과 양심의 보루이다. 서로 통할 수 있을 사람들이다.

석궁사건은 교수사회와 법관사회의 세속화의 산물이다. 사회에는 좀 신비스럽고 권위가 배어 있는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어졌다. 자연히 “그쪽의 판단을 믿소” 하는 신뢰도 없어졌다. 신뢰 부재가 직접 내 손으로 처리하는 응징과 보복을 불렀다. 통하면 없었을 일이 통할 수 없기에 일어난다.

김중겸<前충남경찰청장ㆍ건양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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