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은 꼼수’로 기억하는 충청인이 많다. 개헌 얘기가 나오면 대권욕 또는 정치 사기술(詐欺術)로 보는 이도 적지 않다. 휴지조각이거나 버려도 되는 헌신짝쯤으로 여긴다. 정치 9단들마다 약속해놓고 안 지켰으니 당연하다.

지난 87년 6·29선언으로 3김씨(DJ:김대중, YS:김영삼, JP:김종필) 복권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 5년 단임제 개헌이 최초의 여야합의로 이뤄졌다. 하지만 그해 야권 후보단일화 실패 속에 치른 대선에서 내각제 문제가 이슈 밖으로 밀린 채, 충청은 영·호남의 갈등 틈바구니에서 정치적 약자가 됐다.

뿐만이 아니다. 이후 정치 변동기마다 충청도를 달래거나 표(票)를 의식한 개헌론이 줄곧 제기됐으나, 모두 허사였다. 그중 충청인에게 충격이었던 것은 지난 90년 초 3당 합당시 내각제 개헌 밀약. 노태우(민정당), YS(통일민주당), JP(신민주공화당) 등 3당 총수가 JP의 소신인 내각제개헌에 합의했다.

- 정치9단들 내각제 헛 공약…불신만

그러나 그 밀약은 YS의 대권욕으로 휴지조각이 됐다. 민자당 최고위원이던 YS는 91년 당무거부 등 초강수를 둬 가며 노태우와 JP를 압박했다. 끝내 ‘물 대통령’ 노태우와 충청도를 등에 업은 JP는 YS의 떼쓰기 앞에 내각제 밀약을 접었다.

YS가 집권한 뒤 JP를 버린 것은 95년 2월. 팽(烹)당한 JP는 충청권을 기반삼아 내각제 개헌을 기치로 자민련을 세운다. 씨가 먹혀 6·27지방선거에서 JP는 압승했고, 다음해 제15대 총선에서 내각제를 공약으로 충청 등지에서 55석을 얻는 기염을 토했다.

JP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97년 대선 때는 DJ와 내각제 개헌추진에 합의한다. 소위 DJP연합이다. 합의문에서 이들은 “DJ를 단일후보로 하고, 양보한 자민련이 총리를 맡는다. 공동정부 각료는 양당이 동등하게 맡는다”며 충청도에 바람을 집어넣었다.

DJP는 또 “99년 말까지 내각제 개헌을 마친다”며 대국민 선언까지 했다. 그러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98년 8월 합의가 파기된다. YS가 집권 직후 3당 합당 때 약속한 JP의 내각제를 버렸듯 DJ 역시 집권 직후 백지화했다. 3김씨 허언들이 충청권에서 개헌불신만 키웠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을 밝힌 지 1주일째다. 다음달 발의를 구체화하는 그는 진정성을 강조하며 탈당까지 시사하고 있다. 16일엔 국가 정책을 대선용으로 모는 세력에 서운함도 감추지 못했다. 야 4당은 정치음모라며 애써 의미를 축소하거나 논의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반대를 넘어 회피인 셈이다.

충청의 여론도 대략 두 갈래다. 현행 5년 단임제를 바꿀 필요가 있으며, 대안으로 노 대통령의 4년 연임제나 내각제에 찬성하지만, 시기는 올 연말 대선을 비켜 다음 정권에서 논의하자는 정도다. 현 정권이 싫다는 층은 아예 욕에 가까운 비난도 서슴지 않는다.

시중 여론의 책임은 노 대통령과 정치권 자신에도 있다. 진정성, 순수성, 당위성을 몰라준다고 서운해 할지 모른다. 하나 대개가 공감하면서도 노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입을 열면 ‘꼼수’로 보고 외면하는 일은 깊은 불신 때문이다.

-신뢰, 감동, 여론이 그 변수

노 대통령의 개헌 제안은 충분한 검토를 거쳤다고 청와대는 말한다. 사전에 국민 여론조사를 해보니 대다수가 정치선진화를 위해 대통령 4년 연임개헌과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를 같은날 치르자고 답했다는 것이다. 전격 제안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를 토대로 대통령이 제안한 것인데 여론이 싹 달라질 수 있느냐며 당혹해한다.

지금대로라면 개헌추진은 쉽지 않다. 정권의 불신과 불만 해소 없이는 쉬운 게임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과반수에 못미치는 여당의 심각한 균열과 함께 야 4당이 대화조차 거부하고 있다. 발의를 고집하는 청와대, 저지하겠다는 야당간의 충돌은 뻔하다.

그렇다고 제 살길 찾기에 나선 여당이나 논쟁에서 비켜선 야당에게 책임도 크다. 60-70%가 차기정권에서 개헌을 다루라는 여론에만 함몰될 게 아니다. 해보자는 30-40%도 여론이니까. 어떤 것이 저비용 고효율의 선진정치문화를 실현시켜 국리민복을 이끌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옳다. 충청권의 개헌론 불신 그것은 곧 정치불신에서 온 자업자득이다. 신뢰와 감동, 그 여론이 변수다. <편집국장·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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