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한 방송사가 세렝게티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세렝게티 초원에서 이동하는 누(들소와 양을 약간씩 닮은 초식동물) 무리가 집중 소개됐다. 누 떼가 강을 건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강을 건너다 잠복했던 악어의 먹이사슬에 걸리는 누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압권은 악어의 날카로운 이빨에 발목을 잡혔다가 몇 시간의 사투 끝에 구사일생으로 생환의 언덕을 오르는 누의 모습이었다. 일단 악어에게 물리면 결과는 십중팔구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언론은 이 모습과 노 대통령의 당선을 기적적인 ‘역전 드라마’로 비유하기에 서슴지 않았다.

‘쾌도난마’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인지 참여정부라는 명칭을 붙인 노무현 정부에게 거는 기대는 그 어느 때와 달랐다. 당선 이전에 노 대통령이 걸어온 길이 남달랐기에 국민들에게 주는 정치적인 만족도도 다르리라고 많은 국민들이 기대했다. 이를테면 이런 유(類)의 것이다. 정치, 경제, 경제중에도 주택문제, 일자리창출 등... 해결해야할 문제는 산적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만이라도 인도의 지도자 비노바 바베가 되리라는 기대였다.

비노바는 국도의 국부로 불리는 간디가 극찬한 인물이다. ‘인도가 독립하면 인도 국기를 처음으로 게양할 사람’이라고. 이런 칭송을 받는 비노바는 ‘부단운동(토지헌납운동)’을 펼쳤다. 비노바가 한 마을에 들렀을 때 땅 한 뙈기 없는 천민들의 처지를 한탄했다. 비노바에 공감한 마을 유지가 백 에이커의 땅을 내놓으려 하자 천민들은 겸손하게도 자신들이 필요한 80에이커만 받겠다고 했다. 이것이 부단운동의 시작이다.

당시 인도 한 가정의 아들 평균수는 5명이었다. 비노바는 유지들에게 땅 없는 천민들을 여섯 번 째 아들로 받아들이고 천민과 함께 토지를 공유하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이들 몫으로 토지 1/6을 헌납하라고 요구했다. 10년 넘게 인도전역을 도보로 순례한 비노바의 호소에 감명 받은 지주들이 영국의 스코틀랜드만한 거대한 토지를 헌납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비노바의 사상을 수용하고 실천한 인도 유지들도 비노바 못지않다. 지도자가 존경받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노 대통령의 인기는 하락중이다. 정책 중에 속시원하게 마무리된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국민들의 판단 결과다. 이런 상황이라면 형식논리라도 노 대통령에게서 비노바의 지도력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심지어 노 대통령 자신이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는 첫 대통령이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는 말까지 했다. 나름대로 위기상황이라고 판단한 후의 대처방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노 대통령의 발언은 위기탈출이라기보다는 늪의 깊이를 더하는데 일조할 뿐이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대목에서 뜻하지 않은 위기를 극복한 리더를 떠올려본다.

위기극복이란 주제에서 어니스트 섀클턴처럼 자주 언급되는 지도자도 없다. 섀클턴은 1914년 대원 27명을 이끌고 남극대륙횡단에 나선다. 그러나 남극 150km 전방에서 배(인듀어런스호)는 부빙(浮氷)에 갇혀 난파된다. 대원들은 부빙과 함께 표류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때부터 구출되기까지 634일 동안 영하 70도가 넘는 혹한과 언제 엄습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과의 사투가 시작된다. 섀클턴은 남극대륙횡단이란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의외의 목표인 사지탈출(死地脫出)만큼은 천신만고 끝에 성공했다. 그것도 낙오자 한 명 없이. 이후 섀클턴은 ‘실패한 탐험가 성공한 리더’라는 별칭과 함께 ‘영웅’이란 칭호를 얻는다.

위기극복 모습이라도 보여야

그런 극한상황에서도 리더를 믿고 따라준 27명의 대원들도 대단하다. 섀클턴이 위기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명확한 비전과 정확한 판단으로 탐험대를 이끌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노대통령은 현재 새클턴 탐험대처럼 부빙에 갇힌 지 오래됐다. 원래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할지라도 지금이라도 ‘탐험대’를, 불황에 허덕이는 많은 국민들을 무던하게나마 귀환시키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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