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욕 꺾이고 미래는 불안, 희망은 이디서 찾아야 하나

허름한 음식점에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 둘 찾아든다. 70년대 초반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한 동기생 모임이 있어서다. 참석자는 해에 따라 늘거나 줄긴 했다. 그런데 올해는 어느 해보다 적다. 친구들 또한 하루하루가 고단했던 것인가. 희끗해진 머리칼에서 녹록지 않은 세파를 본다. 졸업생의 채 절반도 대학문을 밟지 못했다. 10대 중반쯤 뿔뿔이 흩어진 뒤 뛰고 뛰어 예까지 달려왔다. 70-80년대에 젊음을 보낸, 이른바 7080세대의 송년회다.

연말 모임이어서인지 무엇보다 북핵(北核)이 화제다. “미국만 가지라는 법 있느냐”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통일되면 우리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한쪽에선 “그렇게 퍼주더니 핵무기 개발 도와준 꼴”이라며 비아냥이다. 티격태격하다가 간첩단 의혹 사건 앞에서 다들 혀를 끌끌 찬다. ‘안보 불감증’ 대목에 이르러서는 아예 입을 닫고 만다. 지원된 쌀이 군량미로 흘러들어갔다는 신문 보도가 있던 날이다.

다시 먹고 사는 이야기에 분위기는 험악해진다. 이처럼 경제가 어려운 적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직장인, 자영업자 가릴 것 없이 늘어놓는 체험담이 절절하다. 반쯤은 투덜대고, 반쯤은 누군가에게 화살을 돌린다. 청와대를 향해 “나라 결딴냈다”는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듣는 이가 민망할 지경이다. 아닌게 아니라 집값 폭등에, 연금제도 개악에 어지간히 힘겨웠던 한해였다. 사교육비에 등골 휜다는 동창들의 푸념 역시 엄살이 아니다. 가계빚이 558조원이라는 뉴스가 실린 날의 저녁 풍경이다.

길지 않은 세월, 앞만 보고 달음박질쳤다. 학교를 마치는 둥 마는 둥 월남으로, 공장으로 직행한 형들의 고마움을 모르지 않는다. 덕분에 아쉬운 대로 교육을 받았다. 산업 현장에서 구슬땀을 많이도 흘렸다. 3년 꼬박 철책선도 지켰다. 근대화를 이룬 아버지 세대를 이어 지식정보화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자부심도 못지는 않다. IMF를 이겨냈건만 이날 희망을 노래하는 이는 없었다. 태어날 무렵 100달러던 국민소득이 1만6000달러를 넘겼어도 가슴은 채워지지 않는다.

낭만적이고 편안한 밤이었으면 좋았으리라.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 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중). 시인은 4·19 세대가 소시민화되는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지만 (이제는)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하는 종반부는 하나의 역설이다. 그것은 한 시대를 숨가쁘게 살아온 이들의 연민이자 자기 위안으로 읽혀진다.

우직한 삶을 꾸려오며 나름의 성취를 이룬 7080들은 왜 분노하는 걸까. 그것은 믿음과 가치가 훼손되고, 희망을 도둑질당해서가 아닐까. 세월은 그동안 열심히 산 만큼 보상을 해주곤 했다. 자랑까지는 아니어도 손가락질 받지 않는 가장이 된 것도 허리띠 졸라매고 일했기 때문이다. 개발독재 시대에도 정직하게 살아온 이들은 정직한 세상과 만났다. 그래서 희망이 있었고 행복했다. 의욕과 사기를 꺾는 현실 앞에서 7080은 절망한다.

7080에게 병자년 겨울은 유난히 뒤숭숭하다. 국가 정체성은 혼란스럽고 사회는 어지럽다. 성장 동력은 꺼져가건만 거들떠보는 이는 찾기 어렵다. 그런데도 한쪽에선 통합신당이니-사수니 하며 드잡이다. 권모와 술수와 배신이 난무할 뿐 나라 생각하는 기색은 어디에도 없다. 정책은 실패했고 리더십은 실종됐는데 양위 타령으로 국민을 괴롭히는 행태는 달라지지 않는다. “지난 대선 때 귀신에 홀렸었다”는 한숨이 빠질 리 없다. “1년을 어찌 더 견디냐”는 소리가 슬픈 합창이 되어 메아리친다. 1년 뒤에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7080의 망년(忘年)의 밤이 그렇게 깊어갔다.

宋信鏞<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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