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돈독한 가족애를 다질 수 있는 한가위는 넉넉함과 용서·화합의 장을 마련해 준다. 시간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가족과 고향을 찾는 행렬의 이면에는 이런 추석의 순기능이 자리하고 있다. `백년만에 찾아온 황금연휴이자 대목`이라는 이번 명절에도 고향과 가족을 향한 줄달음질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또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삶의 의욕을 북돋우는 동기와 능력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커지는 경제·정서적 거리감

그렇지만 이번 한가위는 그 어느 때보다 박탈적 빈곤과 상실감을 감내해야 할 것 같다. 최고 9일에 달하는 긴 연휴는 `휴식의 양태`마저도 분화시켰기 때문이다. 중국·일본·홍콩·태국 등지로 이어지는 해외여행은 길고 긴 연휴 기간 한번은 다녀와야 하는 의례가 돼버린 듯 하다. 시간과 자금에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라도 국내 유명 산과 휴양지를 찾았다. 이런 대열에 합류하지 못했던(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박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곧 긴 연휴를 `품위있게` 지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간에는 경제적 거리(Economic Distanciation)는 물론 사회적·정서적 거리(Social·Emotional Distanciation)가 형성된 셈이다.

상대적으로 더 큰 상처를 입는 것은 농사를 지으며 농촌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다. 한미 FTA협정 문제로 혼란을 겪고있는 농촌에서 본다면 이런 현상은 `배부른` 사람들의 얌통머리 없는 행태다. 기실 지금 농촌, 특히 `쌀`을 생산하는 농가들은 사경을 헤매고 있다. "외국 쌀 먹인 자식 에미 애비도 몰라본다", "수입쌀 먹으면 사나이는 몸이 가벼워져 바람 부는 날 밖에 나가면 바람에 날리고 여자는 정조가 가벼워진다"는 살벌한 구호는 사태의 심각성을 엿보게 한다. 이 구호는 1901년 제물포항을 통해 안남미가 처음으로 수입될 당시 나왔다가 100여년이 넘어 최근 다시 등장했다. 당시 쌀은 민족의 혼이었고 생명줄이었다. 벼를 재배하는 농민들에게 있어 이런 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이 쌀과 농촌에 갖고 있는 인식은 이율배반적이다. 국가차원에서 식량안보를 위해 농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에 반대를 표명하는 국민은 드물다. 그러나 농촌의 다원적 기능유지를 위해 세금을 추가로 지급하거나 다소의 불이익을 감수하겠느냐는 물음에는 대체적으로 인색하다. 이는 이중적 농촌관이 빚어낸 유산이다.

농촌에 대한 마음의 빚 갚을 때

역대 정부는 수출지향주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도시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쌀가격을 묶어놓았다. 쌀값이 저임금 도시노동자들의 생계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서 노동자들은 암묵적으로 자신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낮은 쌀값정책을 지지했다. 농촌출신자들마저 `먹고 살기 위해` 농촌의 어려운 현실을 외면한 결과 농촌과 도시의 격차는 심화되었다. 1987년의 민주항쟁이 도시인의 생활여건을 크게 향상시켰다지만 농촌의 열악한 현실은 철저히 외면되고 말았다.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던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요인 중 하나가 농촌경제의 파탄이라는 지적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가입한 OECD회원국들 대부분은 농촌의 소득이 도시의 소득을 뛰어넘는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지구촌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러나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고 농업을 이어받았다는 이유로 `빈곤의 덫`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분명 타개되어야 한다.

농촌과 도시는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해 주고 이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는 공생관계로 발전해가야 한다. 이제 농촌과 농가에 진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할 때가 왔다. 식량안보차원에서라도 농촌과 농업에 대한 지원과 발전방안은 지속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기업이 농촌이나 농업을 지원하거나 사업을 제휴하고 마케팅에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반가운 일이다. 농촌과 도시가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상생의 방안을 모색해 보는 이번 한가위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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