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휴일 가꿔보자

사비백제시대(538-660년) 최후의 보류였던 부소산성(사적 제 5호).

백제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장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삼충사와 적에게 식량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불태워 아직까지 타버린 곡식이 발견되는 군창터가 있어 중요한 군사요새였는가 하면 낙화암과 고란사라는 애달픈 사연이 담긴 유적지이기도 하다.

우수한 백제문화를 생산해낸 산실이기도 한 이곳은 가볍게 넘겨볼 수 있는 설화와 전설이 곳곳에 숨어있다.

◇ 서북사지

기록이나 연혁이 남아있지 않고 현재 절터만 있다. 부소산 서쪽편 구릉에 자리잡고 있어 ‘서북사지’라 불리고 있으나 누가 만들고, 이름이 무엇인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비교적 작은 규모의 절터에는 백제사찰 특징인 금당 후면의 강당이 없다. 지형조건이 협소해 강당을 세우지 않았다는 추정과 백제왕실의 원찰(願堂)로 건립됐을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왕비가 죽은 왕의 명복을 빌었었던 곳으로 강당을 두면 사찰 규모가 커져 원찰 기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 건립당시부터 규모를 작게 했다는 것.

텅빈 절터를 바라보며 어느 왕비가 왕의 명복을 위해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상상해 보면 숙연함이 든다. 당시 2년이란 짧은 기간 재위했던 법왕(?-600)의 왕비가 절개를 지키며 이곳에서 법왕의 명복을 죽는 날까지 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백화정

백제 멸망과 함께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백화정(百花亭)은 1929년 일제시대에 세운 곳이다.

조선중기 문신 홍춘경(1497-1548)가 ‘부소낙화암(扶蘇落花巖)’이라는 시에서 ‘낙화암 언덕에 꽃이 피었으니 비바람이 차도 모두 날라가지 않았다’고 궁녀들의 절개를 기리기도 했다.

이곳에 봄이 되면 궁녀들이 꽃으로 환생한 듯 주변이 온통 새빨간 진달래로 뒤덮힌다.

나라가 멸망해 전쟁노예로 살기보다 죽음을 택했으니 그 영혼이 꽃으로 피어날 만도 하다.

백화정에서 내려다 보는 백마강의 풍경이 아름답기 그지없으나 수많은 궁녀들이 바위에 부딪쳐며 떨어져 죽은 역사앞에는 숙연해 진다. 아쉬움 점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한 시설이 없다는 것. 꽃을 떨어트린다든지, 향을 피워 달래주는 것이 도리인 듯싶다.

◇ 고란사

뒤로는 깍아내린 듯한 암벽으로 둘러쌓여 있고 앞으로는 전망이 트여 굽이 도는 백마강이 한 눈에 내려보인다.

연문양의 조각된 2개의 섬세한 초석위에 세워진 이곳은 일반적인 절과는 대조적으로 탑도 없이 강가에 세워졌다. 때문에 건립당시에는 사당이나 암자 성격으로 세워졌다고 추측되고 있다.

백제의 마지막왕인 의자왕(?-660)은 이곳을 연회장으로 활용했다. 고란사 종각 뒤편 바위는 아직도 형태가 뚜렷하게 제단처럼 3단으로 깍여있는 곳이 있다. 술자리를 만들어 신하들과 여흥을 즐겼을 곳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백제 멸망하기 이전 무왕 시대까지 신라와 싸워 단 한차례도 져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전승기념 연회를 벌였다는 얘기가 설득력이 있다. 암벽으로 둘러쌓여 세상에서 밀폐된 공간이지만 백마강이 내려보이는 더 없이 아름다운 경치.

대웅전의 불상 가운데 하나는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궁녀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하얀옷을 걸치고 있다.

◇ 구드레 나루터와 솥바위

백마강에는 백제시대부터 사용됐던 나루터 16개가 존재한다. 이 가운데 구드레 나루터를 제외한 나머지는 강 건너에 있다. 지금도 고란사에서 구드레 나루터까지 유람선이 운행되고 있으니 1500여년간 배가 오갔던 나루터다.

구드레 나루터는 왕이 부소산성에서 강을 건너 백제의 국찰이었던 왕흥사지로 제를 올리기 위해 건넜던 나루터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절이 물가에 있고 단청이나 장식이 크고 화려하며 왕이 항상 배를 타고 절에 가서 향불을 올렸다”고 기록돼 있다.

아마도 이 배를 타고 가는 대왕행차는 어느 행차 못지 않게 화려했을 것이다. 구드레 나루터 반대편에는 솥바위라는 넓직한 바위가 있는데 왕이 도착하기 전 불을 지펴놓아 항상 따뜻하게 유지됐다고 한다. 현재는 사구가 생기면서 강폭이 좁아져 물에 잠겨 있다.

부소산성은 일제시대로 관광지로 개발돼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백제의 흥망성세를 느끼기 위해 찾았다.

그러나 발굴된 유구와 유적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정비를 받지 못한 채 발굴 뒤 임시복토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왕궁은 아니었으나 부소산상은 현재까지 수많은 건축물이 건립되고 소멸되기를 거듭해 왔기 때문에 돌 하나하나 마다 선조들의 피와 땀이 새겨져 있는 곳이다.

조선후기에 건립된 건물보다 오래된 건축물은 없으나 백제시대 도읍으로 우수한 백제문화를 생산해낸 산실임에는 분명하다.<宋泳勳·張泰甲 기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송영훈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