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광복절만 되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자고 다짐한다. 잊혀진 독립운동, 무관심속에 묻혀버린 애국, 심지어 매국이 뒤틀려져 애국으로 둔갑한 사례들이 민족정기라는 탈을 뒤집어쓰고 등장한다. 올해도 광복절이 어김없이 찾아왔고, 크고 작은 단위의 광복절 행사장에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자고 또 다시 외쳐댔다. 당연하지만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내년에도 같은 행태가 반복되리라.

대전에 생가가 있는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를 보자.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는 단재의 가묘가 있다. 지난 98년 홍수로 묘가 붕괴된 이래 가묘상태다. 유족들이 이장하려해도 걸림돌이 너무 많다. 독립운동가요 민족사상가라면 으례 그만한 추앙을 받을만한데도 초라하기 짝이 없다. 말로는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민족사상을 고취시켰다고 추켜세우고 실제 대접은 왜 이럴까?

단재가 변절의 상징인물인 신숙주 가문에서 태어나서도 아니요, 독립운동을 하면서 무정부주의자를 표방해서도 아니다. 무정부주의동방연맹 결의실천을 위한 잡지발행 자금으로 채권을 위조한 화폐관련사범이라는 이유도 더더욱 아니다. 단재가 무국적자이기 때문에 1962년 건국공로훈장까지 수여한 조국이 편안한 묘자리 하나 제대로 마련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묘상태 단재 구천 떠돌아

단재는 나라가 완전한 식민지화에 이르자 1910년 5월 망명한다. 일제는 1912년 조선민사령을 만들어 조선인 장악을 시도했다. 당연히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거부했다. 더구나 중국 등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의 가족사항 신고거부는 말할 나위없다. 1948년 헌법이 제정됐고 그 이전에 사망한 이들은 국적을 취득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단재는 무국적자가 됐다.

1936년 2월 뤼순감옥에서 옥사, 유해가 귀래리로 돌아왔다. 무국적자이기 때문에 암매장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가로서 단재만 무국적자가 아니다. 헤이그 밀사 이상설, 상해임시정부 요인 김규식 등 200-300명에 이른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국외로 망명해 독립운동하다 사망한 이들의 국적회복이 시급하다. 국적회복이 이뤄져야 민족정기가 바로 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이 가로막는다.

그래서 2005년 ‘무국적사망 독립유공자의 국적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발의됐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다. 후손들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자고 하면서도 이를 실행에 옮기는데는 야속하리만큼 인색하다.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밑거름 삼아 현재의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지위나마 회복시키자는데는 소극적이다.

관광객들 상해臨政 후원 기피

정부만 탓할 수는 없다. 지난해 12월 상해임시정부청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우리 일행이 도착했을 때 한 무리가 관람을 마치고 나왔다. 몇몇의 얼굴에는 자못 진지함이 배어 있었다. 우리 일행 뒤에도 관람객들이 이어졌다. 2층 한 방에는 방명록이 놓여 있었다. 일행은 방명록 서명을 시도했다. 하지만 대부분 안내인의 한마디에 집어 들었던 필기도구를 도로 내려놓고 1층으로 내려갔다. 청사와 관련된 기금을 후원하는 이들에게만 방명록 서명을 허락한다는 안내인의 설명 때문이다. 순간 망설여졌다.

지갑의 부피가 줄어들겠다는 현실적인 감정이 앞섰다. 그러나 곧 ‘후원금은 조국독립을 위한 희생에 비하면 만분의 일도 안된다’는 이성적인 결론을 내렸다. 옆으로 비켜서 지켜봤다. 방문객 대부분이 필기도구를 들었다 놓았다하는 것이었다. 조국 위해 몸 바친 이들에 대한 후대들의 보답이 미약하기 짝이 없어 씁쓸한 마음을 금하지 못했다.

며칠 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친일파 재산환수를 위한 조사를 시작한다는 소식은 올 광복절이 다른 해와 조금 다름을 느끼게 한다. 반민특위 해산으로 청산되지 못한 민족사적 왜곡현상을 바로 잡아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이번엔 반민특위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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