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사가현 가카라시마에 무령왕 기념비 건립

2001년, 아키히토 일왕은 “나 자신 간무(桓武·재위 781-806)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續)일본기’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의 연(緣)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한·중(남조)·일(왜) 3개국을 연결하는 동아시아 연대를 구축하고 백제의 번영을 도모했던 무령왕이 일본인의 조상임을 시인하는 발언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무령왕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일본 사가현 가라츠시 소재 가카라시마((加唐島)에 무령왕 기념비가 건립된다. 기념비 제작에 얽힌 역사적 배경과 그 과정을 살펴본다.<편집자註>

◇무령왕 탄생지-가카라시마

‘일본서기’ 유랴쿠(雄略) 천황 5년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백제 개로왕이 동생 곤지(昆支)에게 일본으로 가라고 요구하자 곤지는 왕비를 달라고 요구했다. 개로왕은 임신한 부인이 도중에 출산하면 모자를 함께 돌려보내라는 조건으로 요구를 수락한다. 왜국으로 가는 도중 개로왕의 부인은 축자(筑紫)의 각라도(各羅島)에서 아이를 낳고 곤지는 모자를 백제에 되돌려 보낸다. 이 아이를 무령왕이라 하고 백제인은 이 섬을 주도(主島)라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서기 461년 6월 1일 큐슈 가카라시마에서 출생했다. 기록상의 이 섬은 현재 큐수 해안, 사가현 가라츠시 소재 가카라시마. 특히 무령왕의 본명이 ‘사마’인 것은 섬(일본어로 시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학설도 있다. 국내 학계에서 일본서기의 기록에 주목하게된 것은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다. 발굴된 지석에는 무령왕의 나이와 생몰연대가 새겨져 있었고 이를 통해 본 무령왕의 일대기는 삼국사기보다 오히려 일본서기의 것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카라시마에는 백제 무령왕이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전설과 태어난 동굴, 태어나서 바로 씻겼다는 우물도 존재한다.

◇건립비 추진과정

가카라시마 주민들은 1999년부터 무령왕실행위원회를 조직하고 무령왕이 태어난 6월마다 무령왕 축제를 지내왔다. 공주시는 이를 알고 무령왕릉 발굴 30주년 되는 해인 2001년부터 이 곳과 교류했고 논의 끝에 무령왕이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오비야우라 동굴 앞에 작은 기념비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기념비 건립 정식 제안은 2003년에 이뤄졌다. 당시 기념비는 2005년 6월 무령왕 축제 기간에 완성키로 했지만 한일 관계의 경색으로 사업 추진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나 문제는 한·일관계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본측에서 설계한 기념비는 백제보다는 신라스타일에 가까운 것이었다. 또 예산 등의 이유로 중국돌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에 따라 무령왕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이 조직됐고 김병헌 교수(공주대 미술교육과)의 설계로 공주지역의 재료를 이용해 제작키로 결정한 것이다. 완성된 기념비는 9일경 시모노세키 건너편 후쿠오까 모지항에 건너가 섬으로 운송될 예정이다.

◇국제 지역교류 모델의 첫 장

윤용혁 교수(공주대 대학원장)는 무령왕 기념비 건립이 ‘국제적 지역교류의 첫 모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역사적 인물을 매게로 한·일 양국의 민간 교류가 이뤄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설명이다. 또 이를 계기로 두 나라 뿐 아니라 백제 무령왕 재위 당시 이뤄진 동아시아 교류의 확대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웅진백제가 중국 남조와 폭넓은 교류를 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 남조의 중심이었던 남경에서 충남 공주를 거쳐 오사카로 이어지는 당시 5-6세기 동아시아시대의 루트 복원이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윤교수는 “무령왕 기념비는 한·중·일 세나라를 연결하는 동아시아 문화 벨트의 첫 시도가 될 수 있다”며 “무령왕의 역사적 위상, 왕릉의 중요성은 물론 한·일 양국 지역민들의 무령왕에 대한 애착과 관심이 반영되면 무령왕릉을 중심으로 한 백제 유산의 세계문화유산 등록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南尙賢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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