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수촌리ㆍ전남 고흥 안동고분등서 ‘햇빛’본 백제 금동관

백제가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2003년 말 공주 수촌리에 이어 최근 전남 고흥 안동고분에서는 ‘무령왕릉’에 필적할만할 굵직한 발굴 성과가 있었다. 특히 두 발굴 현장에서는 공통적으로 백제시대 금동관이 발견돼 눈길을 끌었다. 백제 도성에서 떨어진 이들 지역 고분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관의 특징과 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섬세한 장식 새겨진 백제금동관

지금까지 출토된 백제 금동관(관모)은 충남 공주 수촌리 2점(2003년), 충남 서산 부장리 1점(2005년), 전북 익산 입점리 1점(70년대), 전남 나주 신촌리 1점과 함께 최근 전남 고흥 안동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관 1점 등 6점이다. 천안 용원리 유적에서도 금동관 흔적이 발견됐지만 훼손이 심해 보존될 수는 없으며 익산 입점리 것은 관모만 남아 있다. 백제 금동관은 공통적으로 관모인 내관과 외관으로 이뤄져 있다. 외관 앞에는 나뭇가지 모양 등의 장식품이 세워져 있으며 관모에는 섬세한 장식이 다양한 기법으로 표현돼 있다. 뒷부분에 작은 접시가 가지에 매달려 있는 듯한 수발 장식이 있는 것도 특징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금동관에서는 형태적인 유사점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고흥 금동관은 형태면에서 입점리 금동관과 비슷하지만 투조(透彫·금속판의 일부를 도려내고, 남은 부분을 무늬로 나타내는 기법)로 문양을 표현한 점은 서산 부장리의 것과 유사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공주 수촌리 금동관은 그 형태나 문양이 일본 구마모토현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에서 출토된 관모와 흡사해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규명하는 열쇠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지방 간접지배 위한 위세품

백제 금동관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기 전 4-5세기 유적에서 발견된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금동관이 유독 이 시기에 발견된 이유를 놓고 당시 지방 지배 제도를 연결시켜 설명한다. 금동관이 한성백제 시기에 충청과 전라 지역에서 집중 출토되는 것은 이 지역에 대한 ‘간접 지배’가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비록 고흥 안동 고분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관에 대해 학계 의견은 분분하지만 백제가 마한지역을 복속한 뒤 지역 수장들을 다스리기 위해 이같은 위세품을 사여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는다. 지방 유력 세력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중앙정부로부터 내려오는 ‘무엇’이 필요했고 중앙은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값진 ‘선물’을 안겨줬는데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바로 그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충청역사문화원 이훈 문화재센터장은 “백제 중앙정부가 지방 세력에게 금동관을 사여한 것은 지역 최고 수장임을 인정한다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금동관은 금동신발과 자제나 종족을 파견한 담로제 이전 시행된 지방 간접 지배를 입증하는 최고 가치를 지닌 유물”이라고 밝혔다.

◇훼손 방지위한 보존처리 시급

백제 금동관은 백제인들의 섬세한 조형미가 고스란히 표현돼 있지만 쉽게 훼손된다는 위험에 놓여 있다. 특히 공주 수촌리에서 발굴된 금동관 2점 중 단 1점만이 보존처리가 끝나갈 뿐 나머니 한 점은 발굴상태 그대로 보관돼 있다. 수촌리 금동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동관 중 가장 양호한 상태여서 복원도 성공했지만 발굴된 지 3년이 다 돼가는 나머지 금동관 한 점은 손대지도 못한 셈이다. 이는 금동관 보존처리가 오래 걸리는 데도 그 이유가 있지만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고흥 안동고분 금동관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키로 했다. 그러나 문화재 종합병원 설립 등을 통해 이들 유물들을 제 때 보존처리 할 수 있는 다각적 지원방안이 모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南尙賢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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