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소재 한국문화재 반환의 새로운 장을 여는 행사가 지난 1일 개성에서 있었다. 북관대첩비가 이날 북한에 인도돼 원래 고향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1905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해 반출된 지 100년 만이다. 이 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약 1세기 뒤인 1709년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가 왜군을 격퇴한 공로를 기려 의거장소인 길주에 건립한 승전비다. 1905년 일본군이 약탈해가 행방이 묘연하다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끈질긴 반환 운동 끝에 지난해 10월 20일 남한으로 환수, 이날 북한으로 인도됐다.

북관대첩비 귀환 의미 크다

북관대첩비의 귀환·인도는 7만여 점에 이르는 해외문화재 환수의 준거(準據)를 마련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일본이 약탈해간 문화재 3만5000점 가운데 되돌려 받은 최초의 사례여서 추가 환수의 계기가 될 것이다. 도쿄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조선왕조실록 반환운동도 최근 환수위원회를 구성, 이달 중에 반환소송을 추진하는 등 활발해진 문화유산 되찾기 움직임이 주목된다.

오늘날 약탈 문화재 반환운동은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하다. 이탈리아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던 ‘호머 자기’ 등을 최근 돌려받기로 했다. 이에앞서 2005년에는 에티오피아가 1937년 이탈리아 파시스트에 빼앗긴 에티오피아 고대 악숨 왕국의 오벨리스크를 환수 받았다.

우리정부도 프랑스와 외규장각도서 반환 재협상에 나서고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약탈해가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는 297권을 되돌려 받기 위해 전담팀을 현지로 파견, 본격적인 환수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외규장각 도서 반환협상은 1993년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던 미테랑의 한국 방문으로 비롯됐다. 미테랑은 경부고속철 기종 선정을 노려 외규장각 도서 반환이란 카드를 내놓았었다. 2001년 민간 대표단이 외규장각 도서를 임대형식으로 돌려받는 대신 국내 다른 문서를 내주는 맞교환에 잠정 합의했었지만 여론에 부딪혀 결국 합의안을 파기하는 곡절을 겪는 등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그나마 올해 정부차원에서 재협상을 시작, 양측이 새로운 반환방식을 논의하며 도서의 공동 디지털화, 한국학자 등의 열람절차 간소화에 합의하는 등 성과를 보이고 있어 다행이다.

정부의지·민간노력이 관건

외규장각 도서 반환협상에서 명심할 것은 그 결과가 국민들로 하여금 내 물건을 빼앗겼다는 박탈감을 갖지 않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잡혀간 큰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 작은 아들을 내줄 수 없다”며 ‘의궤 대 의궤’ 맞교환방식을 반대했던 사실을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다. 올해는 한-불 수교 120주년이다. 170여건에 이르는 각종 공연과 전시회가 열리는 등 양국의 문화교류가 활발할 것으로 보인다. 외규장각 도서 반환협상에 거는 기대가 큰 것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이다. 중요한 것은 문화 주권에 대한 정부의 의지다. 패배의식에 젖어 발언권을 포기해선 안된다. 그러나 민족적 에고이즘을 내세워 감정적 반응 또한 경계해야 한다. 성과에 매달린 한건주의나 지나친 야심은 버려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와 민간 차원의 노력도 중요하다. 최근 일본에서 60여년만에 돌아온 추사 김정희의 친필 서화, 편지첩, 사진자료 등 2700여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 이 자료들은 일제강점기 추사연구를 개척한 일본인 학자 후지즈카 치카시가 평생 수집한 자료로, 추사 서거 150주년을 기념해 그의 아들 후지즈카 아키나오가 경기 과천시에 기증한 것이다. 나라 밖에 개인 소장 문화재들이 적지 않게 있다는 점에서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을 통한 다각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역사평가를 담보한 소명감이 필요하다. 30년의 노력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본래 자리로 돌아온 북관대첩비의 귀환은 빼앗긴 문화재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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