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배 충남대 한문학과 교수
이향배 충남대 한문학과 교수

어리석은 사람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제 잘난 맛으로 산다. 조선 시대 소인배로 지목받은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가 유자광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그는 부친의 사랑을 받으며 공부를 열심히 했다. 시재도 뛰어났고 두뇌도 명석한 그는 출세하려는 욕망을 품었다. 그러나 자신이 과거시험을 볼 수 없는 서얼 신분임을 알게 됐다.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었다. 학문을 포기한 유자광은 갑사(甲士)가 돼 남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유자광은 조정에 상소문을 올렸다. 자신도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참가해 역적을 벨 수 있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세조는 강녕전에 그를 불러서 역적을 토벌할 수 있는 책략을 물었다. 유자광은 정병 300명만 주면 이시애의 목을 베겠다고 했다. 그 기백을 가상히 여긴 세조는 역적을 토벌하는 데 유자광의 대책을 활용했다. 결국 반란군 진압에 큰 공을 세우게 된 유자광은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서얼로서 최초로 병조정랑에 임명됐다. 조정에서는 서얼의 신분을 내세워 낭관의 임명에 반대한 신하들이 많았다. 세조는 그대로 임명할 뿐만 아니라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도 줬다. 유자광은 문과 초시에 대책문을 지어 응시했다. 신숙주가 낙방시켰지만 세조는 그 대책문을 직접 살펴보고 1등으로 합격시켰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인정해줬던 것이다.

유자광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술수를 교묘하게 사용했다. 예종이 보위에 오르자 유자광은 남이장군이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했다. 남이장군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자 그는 공신으로 무령군에 책봉됐다. 유자광은 평소 김종직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연산군 때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성종실록에 수록된 사실을 알게 됐다. 김일손이 성종실록을 사초할 때 스승의 이 글을 끼워 넣었다.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베껴서 일일이 풀이한 다음 연산군에게 올렸다. 결국 김종직은 부관참시 됐고 수많은 선비들은 참형을 당했다. 이 사건이 무오사화이다. 연산군의 폭정을 못 견디고 반정이 모의 되자 유자광은 그 모의에 가담하였다. 중종반정이 성공해 유자광은 공신으로 무령부원군에 책봉됐지만, 점차 권력을 잃어갔다.

돌아가는 정세를 살펴본 유자광은 자신이 모함해 부관참시당한 김종직이 신원될 것을 직감했다. 그는 자신과 닮은 노비 한 명을 선발해 좋은 옷과 음식으로 특별하게 대우했다. 집안일에 공을 세웠다는 명분이었다. 유자광은 몰래 아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허름한 옷을 입혀 장사지내고 저 노비가 죽거든 자신의 옷을 입혀 장사지내주라고 했다. 그리고 누가 찾아와서 자신의 무덤을 묻거든 노비의 무덤을 가리켜 주라고 지시했다.

어느 날 사람들이 몰려와서 유자광 무덤의 소재를 물었다. 유자광 아들은 아버지 무덤 대신 노비 무덤을 알려줬다. 사람들은 그 무덤을 팠지만 유골만 남은 상태여서 유자광의 시신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다만 복장을 보니 귀한 신분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유자광의 시신이 맞는 것으로 판단한 사람들은 그 유골에 난도질을 하고 돌아갔다. 김종직의 후손들이 찾아와서 원한을 복수한 것이었다. 유자광은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을 미리 알고 대처해 자신의 시신도 온전하게 지켰다.

유자광은 조선의 신분제가 낳은 불행한 인물이다. 당시 제도에서는 서얼이 뛰어난 재주와 지략을 가지고도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없었다. 유자광이 신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훈공을 세우는 방법뿐이었다. 그 명석한 머리로 남을 모함해 수많은 사람을 해치며 훈공을 세우고 출셋길을 도모했다. 그 결과 현실에서는 높은 지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뒀지만 역사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소인배로 기록됐다. 이는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사람으로서 진정한 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공자는 이런 사람을 가장 어리석고 못난 사람 하우불이(下愚不移)라고 했다. 권력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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