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호 배재대 미디어콘텐츠학과 교수
강병호 배재대 미디어콘텐츠학과 교수

`어느 독일인 이야기` 는 독일 언론인 제바스티안 하프너(Sebastian Haffner)가 나치 집권기를 회고록 형식으로 집필한 책이다. 그는 나치(Nazi)의 급격한 부상에 분노하며 영국으로 탈주한 자신의 청년기를 담담하게 기록했다. 이에 더해 독일인들이 어떻게 나치에 열광하거나 침묵하며 공멸의 길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치밀하게 기록했다.

역사가들은 철학의 나라, 위대한 칸트, 헤겔, 니체를 배출한 독일이 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나치당(黨) 같은 미치광이 집단이 집권하도록 방치했는지 의아해한다. 놀랍게도 나치는 선거를 통해 집권했고 이성의 나라 독일을 1933년부터 1945년까지 통치했다. 당시를 경험한 독일인들은 나치 집권기에 "무엇엔가 홀린 듯했다"고 공통적인 증언을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요즘 유행하는 `핵 사이다` 발언의 원조는 히틀러일 것이다. 히틀러는 1차 세계 대전의 패배와 경제 대공황으로 절망하던 독일 국민들을 단순하고 감정적인 언어로 사로잡았다. 그는 오페라 배우들의 동작, 대사를 연구하며 군중을 선동하는 법을 연습할 정도로 선동에 집착했다. 히틀러는 "군중은 여성적이고 어리석다. 그들은 감정과 증오에 의해서만 통제된다"고 말했다. 군중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준다는 단순한 메시지로 수많은 군중을 끌고 다니자 독일 지식인들은 히틀러의 존재를 방관하거나 동조했다. 그중에는 저명한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도 포함된다. 독일 지도층은 국내에선 유대계 권력을 견제하고 밖으로는 볼셰비키의 팽창을 막는데, 단순 무식하고 약간 우습지만 나치가 그런대로 써먹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이용할 수 있다고 착각한 나치는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통제 불가능한 괴물이 돼 독일과 세계를 파멸로 끌고 가는 저승사자가 되었다.

둘째, 히틀러는 요즘 SNS 같은 첨단 미디어 기술을 선전선동에 사용하는 데 천재였다. 1930년대 유행했던 상업영화를 적극적으로 정치선동에 활용했다. 막 대중화되던 라디오도 역시 전략적으로 이용했다. 히틀러는 세계 최초로 비행기를 선거운동에 사용하기도 했다. 선전선동의 중심에는 "100%의 거짓말보다는 99%의 거짓말과 1%의 진실의 배합이 더 나은 효과를 보여준다"라는 말로 유명한 나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가 있었다.

셋째, 권력에 아부하는 독일 사법부가 히틀러의 불법행위를 방관했다. 독일 사법부가 적어도 상식적이었다면 히틀러를 몇 번이고 처벌할 수 있었다. 1923년 11월 8-9일 동안 있었던 뮌헨 반란사건의 주동자로 히틀러는 체포되고 재판을 받았으나 금고 5년 형의 가벼운 처벌을 받았고 그것도 13개월 만에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집행유예 상태였고 국적이 오스트리아여서 판결에 불리했던 히틀러에게 독일법원은 공정한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히틀러 외조카 겔리 라우발 (Angela Maria Geli Raubal)은 1931년 히틀러의 집에서 권총자살 했다. 여러 정황을 보면 히틀러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은 것 명백했지만 독일 사법당국은 애써 눈을 감았다. 당시 독일 사법부를 보면 초대형 비리와 잇단 의문사에도 눈 감고 있는 한국 검찰을 보는 듯하다.

선거를 통해 히틀러를 권좌에 앉힌 독일의 선택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에서만 군인 사망자는 325만 명, 민간인 사망자는 244만 명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사망자는 6000만 명에 달했다. 인종청소로 죽은 유대인 600만 명도 포함된다. 1932년 독일의 투표가 전 세계를 지옥에 빠뜨린 것이다.

한국은 3월 9일 (사전투표 3월 4-5일) 국가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선거를 앞두고 있다. 상식을 가진 유권자들은 지금 독일이 주는 교훈을 다시 생각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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