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82세... “자식들 떳떳하게 인정받는 세상 만들려고 여태 산 거야”
“아들 곁에서 편히 쉬세요” 애도 이어져... ‘민주유공자법’ 제정 숙제로

생전의 배은심 여사가 지난해 6월 9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이한열동산에서 열린 제34주기 이한열 추모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생전의 배은심 여사가 지난해 6월 9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이한열동산에서 열린 제34주기 이한열 추모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고(故)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가 9일 오전 5시 28분 광주 조선대병원에서 향년 8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배 여사는 지난 3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가 전날 다시 쓰러져 조선대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의료진은 정확한 사인을 판단하기 위해선 부검이 필요하다는 입장인 걸로 전해졌다.

타 지역에 있는 배 여사의 가족이 모두 병원에 도착하는 대로 유족들은 부검 여부 및 장례 절차 등을 결정할 예정이다.

전남 화순 출신인 이한열 열사는 1987년 6월항쟁 당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유명을 달리했다. 사망 당시 이한열은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으로 겨우 21살이었다.

3녀 1남의 막내였던 아들의 장례식 조사에서 배 여사는 "이 많은 청년들이 니 가슴에 있는 원한을 풀어주길. 안되면 엄마가 갚을란다. 안 되면 엄마가 갚아"라며 애통해 했다.

평범한 주부였던 배 여사는 이후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 숨진 열사들의 유가족 모임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유가협 생활공동체인 `한울삶`에서 활동하며 여생을 민주화 운동에 바쳤다.

1986년 8월 창립한 유가협은 고(故) 전태일 열사의 모친인 고(故) 이소선 여사와 고(故) 박종철 열사의 부친 고(故) 박정기씨 등이 함께 했다.

1998년 유가협 회장을 맡은 배 여사는 422일간 국회 앞에서 천막 농성을 벌이며 `민주화운동보상법`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정 등을 이끌어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용산참사 당시엔 용산범대위 공동대표를 맡는 등 평생을 민주화와 소외계층을 위해 싸웠다.

배 여사는 이런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6월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이한열 열사의 연세대 상대 선배인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페이스북에 "계룡산 자락에서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아니 우리시대 모두의 어머니셨던 배은심 여사님의 부음을 마주합니다"라고 배 여사의 타계 소식을 전했다.

이 대표는 `아!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이른 아침, 산사(山寺)를 휘감는 스산한 겨울바람이 슬픔을 더합니다"라고 애도했다.

역시 연세대 출신인 우원식 의원도 "소식을 새벽에 들었다. 너무나 황망하다"며 "아들이, 민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열사들이 민주 유공자가 되는 것을 그렇게 소원했는데"라고 안타까워했다.

네티즌들도 배은심 여사의 타계 소식에 "모자의 삶에 우리가 정말 많은 빚을 졌다. 정말 감사드린다", "그토록 그리웠을 아들 곁에서 부디 영면하세요" 등 명복을 비는 댓글로 고인을 기리고 있다.

배 여사는 전두환의 사망 소식에 지난해 12월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나는 전두환이가 죽으면 마음이 편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속이 상해. 입 딱 다물고 있다가 죽으니까 오히려 울분이 터지더라"고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알면 전두환 그자를 대통령이라고 부를 수가 있느냐. 열불이 난다"며 가슴을 친 배 여사는 "군사독재에 맞서 싸운 우리 자식들은 아직도 비방에 시달린다"며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거듭 촉구했다.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은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과 그 유족 또는 가족에게 국가가 합당한 예우를 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숭고한 가치를 널리 알려달라`는 취지의 법안이다.

지난 15대 국회부터 21대 국회까지 법안은 계속 발의되고 있지만 제대로 된 논의조차 진행하지 못하고 법안은 회기만료료 자동 폐기 또는 철회를 반복하고 있다.

지난해 초에도 설훈 민주당 의원 등 범여권 의원 73명이 `민주유공자법` 제정안을 발의했지만 논란 끝에 법안을 철회한 바 있다.

"아들이, 민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열사들이 민주 유공자가 되는 것을 그렇게 소원했는데"라는 우원식 의원의 페이스북 글은 이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위한 배 여사를 포함한 유가협 유족들의 애타는 바람을 전한 것이다.

민주유공자법 제정 관련해 이미 80~90대인 유가협 유족들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도 이렇게 무심한데 우리가 죽고 나면 누가 하겠는가.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나섰다"며 지난해 10월 7일부터 국회 앞에서 천막농성에 돌입해 석 달 넘게 이어가고 있다.

배 여사는 지난해 말 생전 인터뷰에서 "얼마 전 꿈에 한열이 묘지가 보이는데 눈이 한가득 덮여있고 고드름이 얼어있는 거야. 일어나자마자 망월동에 전화했더니 한열이 묘에 눈이 진짜 왔다고 하더라고. 걔가 그런 식으로 한을 얘기하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우리는 종철이, 한열이, 자식들 떳떳하게 인정받는 세상 만들려고 여태 산 거야. 내 자식 명예가 되찾아지지 않으면 전두환이 노태우가 죽어도 독재는 끝나는 게 아니다"고 배 여사는 말했다.

고 배은심 여사의, 유가협 유족들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재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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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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