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선 배재대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김화선 배재대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2021년 12월 31일 자정을 기점으로 신축년을 보내고 임인년 새해를 맞이하였다. 검은 호랑이의 기운을 받아 힘차게 나아가는 한 해를 보내라는 덕담을 나누고 SNS로 일출 장면을 공유하면서 다시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음을 실감한다. 이래저래 달라진 세밑 풍경을 뒤로 하고 이제 출발하는 2022년을 어떤 자세로 보내야 할지 고민해본다. 시간이야 자연스럽게 흘러가기 마련이라고들 하지만 인생이란 결코 물리적 시간을 축적하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기에 얼마나 살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는가가 중요한 법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과거에서 현재, 다시 미래로 흐르는 물리적이고 객관적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가 아니라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주관적 시간인 `카이로스(Kairos)`를 살아가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벗어나 카이로스의 시간을 산다는 의미는 가장 자기다운 방식으로 시간을 창조하는 삶을 이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그 순간은 몇 월 며칠 몇 시가 중요하지 않고 그 시간이 나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기 때문에 말 그대로 특별한 것이다. 그래서 강렬한 결단의 순간이든 구체적이고 생생한 각성의 때이든 자신이 삶에서 경험하는 사건들이 시간에 새겨질 때 비로소 우리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한 해 역시 속도전을 방불케 하는 일상의 쳇바퀴에 갇혀 지냈던 것만 같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몸은 고립되었으나 거리두기를 하는 시간 동안 스스로를 성찰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루도 짧고 한 달도 금방이고 한 해도 쉬이 흘러가니 점점 빨라지는 인생의 속도를 좇기 어려운 지경에 다다랐다. 그러다 문득 속도를 줄이면 사람이 보인다는 교통안전 슬로건을 보며 아차 싶은 마음으로 다시 내 인생의 시간을 돌아보게 되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만 생각하느라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을 즐기거나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고, 길가 풍경을 놓친 채 때론 멈추었다 재충전한 뒤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조차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시인 나태주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노래했지만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자세히 두고 볼 시간적 여유도 넉넉한 마음도 뒤로 밀쳐두고 오늘이 몇 월 며칠인가만 계산하며 살아왔다는 깨달음이 새로 시작하는 1월의 날들 앞을 비집고 들어선다. 원래 삶이란 예측불가능한 우연성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보편의 영역에만 매몰되어 개별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시간을 외면했던 듯하다. 살아온 시간 만큼 먹은 나이는 저 멀리 도망가지 않고 내 몸에 정직하게 쌓여 있는데 내 삶이 특별해지는 카이로스의 순간들은 어느새 놓치고 말았나 보다.

그러니 이맘때가 되면 좀 감상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봐도 좋을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가 `향수`라는 제목으로 표현한 날개 달린 남자의 외로움과 다리에 앉은 사자의 조합이 이끄는 비합리적인 상상의 세계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다른 눈으로 응시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처럼 논리로 포착할 수 없는 잉여의 잔여물을 응시하는 시선이야말로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갈 용기를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새로운 해를 맞이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희망찬 새해를 계획하는 이성의 목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멜랑콜리한 감정에 기대어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는 방식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검은 호랑이가 주는 기개와 용기는 이전과 다른 자세로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갈 때 오롯이 내 삶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김화선 배재대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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