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률 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양승률 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이제 겨울이 한창인데 벌써 봄이 기다려진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다고 하지 않던가. 잠시나마 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미디어 영상 특별전이 지금 대전시립박물관에서 펼쳐지고 있다. `고산구곡(高山九曲)`을 그린 고산구곡도는 율곡 이이(李珥, 1536-1584)가 제자들과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황해도 해주 고산 석담리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시립박물관이 소장한 고산구곡도는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1606-1672) 후손가에 전해오고 있었는데, 가로로 2m가 넘은 긴 두루마리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림 위에는 율곡이 지은 10수의 한글 시가 적혀 있고, 흥미롭게도 이를 다시 우리 고장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한문으로 번역한 시가 있다. 또 그 옆에는 우암과 그 제자들 아홉 명이 고산의 아홉 구비마다 한 수 씩 지은 한시가 자리 잡고 있다. 이 그림은 기호학파의 학통을 시각화한 작품으로, 후에 우암의 강학공간인 화양구곡을 그린 화양구곡도(華陽九曲圖)나 후손인 연재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강학처인 무계를 그린 무계구곡도(武溪九曲圖)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쉽게 가볼 수 없는 스승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산수정원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또 그 제자들의 감상 시가 그림과 같이 있으니, 옛사람들도 이런 그림을 통해서 직접 가지 못하는 아쉬움과 그리움을 달랬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 내가 그것을 미디어 영상으로 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내가 그 중 가장 눈여겨본 것은 `오곡(五曲)`이다. 오곡에 대해 율곡은 "오곡은 어디멘가. 은병(隱屛)이 가장 보기 좋다. 물가 정사(精舍)는 맑고 깨끗하기 끝이 없네. 이 속에서 강학(講學)을 하고 달과 바람 읊조리리라"라고 읊었다. 이에 대해 우암은 다시 한문으로 "五曲何處是(오곡하처시) 隱屛最好看(은병최호간) 水邊精舍在(수변정사재) 瀟灑意無極(소쇄의무극) 箇中常講學(개중상강학) 詠月且吟風(영월차음풍)"이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오곡이라고 말하니 내 생각은 벌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수정원 중 하나인 전남 담양 소쇄원(瀟灑園)에 가있다. 소쇄원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아름다운 담장에 쓰여 있는 우암 글씨인 `오곡문(五曲門)`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이 글씨를 볼 때마다 그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어 안타까웠다.

그러나 근래 고산구곡도 전시와 율곡과 우암의 시를 다시 음미하면서 우암이 소쇄원의 문 이름으로 오곡문이라고 한 것에 대한 의문을 풀었다. 그가 번역한 한시 속에 `소쇄(瀟灑)`며 물가 정사(水邊精舍)가 있고, 달과 바람을 읊조림(詠月吟風) 즉 소쇄원 안에는 제월당(霽月堂)과 광풍각(光風閣)이 있으니, 이를 염두에 두고 오곡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이름 지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1755년(조선 영조 31년) 제작된 `소쇄원도(瀟灑園圖)`에서도 소쇄원과 제월당, 광풍각, 오곡문 등에 우암의 글씨가 있다고 하고 있어 더욱 믿고 싶어진다.

고산구곡 전시를 보고 있노라면, 고산구곡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미디어 영상으로 봄·여름·가을·겨울 사계가 그림처럼 펼쳐지고, 그 속 어느 사이엔가 나도 모르게 내가 거닐고 있는 듯한 벅찬 감동이 느껴진다. 어느 따뜻한 봄날에는 나도 마음 속에 고산구곡도를 품고 오곡의 시를 읊으며 다시 소쇄원을 나들이 해보련다. 이것이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 것인가. 양승률 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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