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길 시인
박순길 시인
연말이다. 한해의 마지막은 회한과 쓸쓸함으로 가득 찬다. 연초의 계획이 연말에 보면 무의미할 정도로 지켜진 게 없다. 그래서 다가올 해에는 개인의 소망보다 아는 선배의 소망을 기원해 본다. 선배는 장항에 살고 있다. 언젠가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기꺼이 선배 집으로 몇 사람을 초대했다. 처음 뵙는 사모님은 아직까지 제주도 여행을 못해봤다고 했다. 이렇게도 사는구나. 몇 달 후 우리는 제주도 여행을 했다.

이렇게 1년에 몇 번 모임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선배의 아들이 회사에서 근무 중 쓰러져 몸을 쓸 수 없다고 했다. 병원을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며 벌써 5년째 재활치료에 전념하고 있다. 며느리는 손자와 함께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 아들의 간병은 하루도 빠짐없이 오로지 선배의 몫이다. 다행히 똘똘한 보험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이나 딱히 해줄 게 없다. 코로나 시국에 병문안도 갈 수 없고 병원 근처의 식당에서 소주 한 잔 권하며 위로하는 것이 전부다.

올해도 농사짓는 사모님이 감이 익어갈 무렵에 우리를 초대한다. 근심을 한아름 안고 사시는 분이 손수 차린 점심을 대접한다. 올 적에는 생강, 마늘, 밤도 얹어 준다. 애써 농사지은 농산물을 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순수한 마음은 순수하게 받아들이자는 나의 지론이나 이런 천사가 또 있을까 싶다.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자식의 고통은 불공평한 세상임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선배가 농사를 짓고 사모님이 아들을 돌보고 싶어도 재활 치료하는 아들의 몸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힘든 농사를 지어 나누는 마음 앞에서 주는 것을 받기도 미안한 마음이다.

새해에는 선배의 가정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기원해본다. 야윈 선배의 얼굴에 웃음이 찾아오고, 미소 지으며 반겨주는 사모님을 보면서 마음 편하게 방문해서 술 한 잔 하고 싶다. 어디 선배뿐이랴. 병으로 본인이 고통받고 있거나 가족 중에 누군가 아픈 삶을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웃음을 주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구겨진 수표에도 가치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인간의 가치가 존경받고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감동으로 눈가가 촉촉해지는 살맛나는 세상이 왔으면 정말 좋겠다. 박순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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