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희 한국 예술행정협회장
유원희 한국 예술행정협회장
요즘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가 한창이다. 앞으로 3개월 후면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된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며 나라의 미래를 설계하고 이를 실천하며 국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의무가 있다.

또한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국가 간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제, 국방, 환경보호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이제 경쟁에서 탈락한 국가는 영원히 약자로 남아야 하는 운명이다. 반도체, 2차 전지, 수소활용과 같은 기술개발은 물론 에너지 확보에도 사활을 걸고 있다. 요소수 사태나 유럽의 가스 가격 급등에서 보듯 모든 것은 이제 하루하루가 살얼음 판을 걷듯 위태로운 경쟁과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이렇게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에 비해 우리나라의 대통령 선거는 역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여야를 떠나 서로 상대당 후보의 흠집내기에 골몰하고 있다. 아직도 미래사보다는 과거사에 더욱 집중하고 내일의 문제보다 어제 일에 더욱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앞을 바라보고 미래를 설계하며 우리나라의 운명을 논하는 사회 풍조가 필요하다. 때때로 우리의 시각보다는 외국에서 보는 생각과 방향도 바라보며 조국의 앞날을 설계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고위관료 출신이나 법조인보다 이제 말보다 행동하고 실천하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위대한 탐험가이자 사회학자이고, 종교인이며 번역가이자 시인이기도할 뿐만 아니라 지리학자인 혜초스님의 드라마틱한 일생을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혜초스님은 대략 삼국시대인 서기 700년(신라 성덕왕)에 태어나 16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 당시 스님들이나 젊은이들의 당나라 유학이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혜초스님은 중국의 광주에서 금강지를 만난 후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스승의 조언에 따라 723년부터 727년까지 4년 동안 수마트라와 스리랑카를 거쳐 인도에 도착했다. 이후 중앙아시와 서아시아의 40여 개 나라를 여행한 후 중국의 서안으로 돌아왔다. 당나라로 돌아온 혜초 스님은 금강지와 해후한 후 불교 번역에 충실하다 입적하였으며, 조국인 신라에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위대한 여정은 왕오천축국전이라는 한 권으로 두루마리로 남아 있다. 이 두루마리는 잔간본으로 앞과 뒤가 떨어져 나갔으나 227행 약 6400여자로 구성되어 있다. 혜초스님의 이동 경로로 보아 경유지인 쿠차 등에 간략한 여행기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이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프랑스의 펠리오에 의해 중국 돈황에서 발견되었다. 많은 연구 끝에 이 두루마리 안에는 40여개 나라의 언어, 풍습, 정치, 기후 등 전반적인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기행문이자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세계 유일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1300년 전 약관의 젊은이가 무려 4년이나 여행하며 깊이 있는 기록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여행은 말 그대로 사선을 넘나드는 고행의 연속이었다. 동행하던 스님의 죽음, 도적 떼의 공격, 혹한의 파미르고원과 죽음의 길 타클라마칸 사막을 걸어서 넘었다. 이러한 스님의 여정은 오늘날의 현대인들 재현하기 불가능한 위대한 길이었다. 화폐도 없었고 교통수단은 걷는 것이 유일한 방법인데 어찌 그 많은 나라를 다니며 굶주림, 풍토병,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에서 그 많은 기록을 남겼단 말인가?

간략본 안에서도 신라를 그리워하고 사신을 만나 당나라로 돌아가는 머나먼 길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시를 남긴 인간적인 혜초스님의 발길이 왕오천축국전이다.

해초스님의 위대한 점은 스님의 시각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풍습과 같이 다양한 것을 생사의 길에서도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이다. 승정원일기나 의궤, 8만 대장경에서 보듯 우리의 기록문화를 다시 생각해본다. 유원희 한국 예술행정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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