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이라는 말의 근원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전문가들의 의견이 모아진다. 기원전 그리스에서 암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카르시노스(karcinos)라고 기술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라틴어로는 캔크럼(cancrum)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암을 지칭하는 영어인 캔서(cancer)의 기원이 되었다. `게`라는 뜻이다. 여성의 유방에 생긴 암을 게로 묘사했다고 하는데, 딱딱한 덩어리가 꽉 달라붙어 제거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암은 자신의 범위를 넘어서서 주변에 뿌리를 깊게 내리는 특징(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침윤` 혹은 `침습`이라고 한다)을 묘사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 한자의 암(癌)은 `병`이라는 글자에 `바위` 자가 더해진 말이다. 즉 바위같이 단단한 덩어리를 만드는 병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이렇듯 암이라는 글자에 암의 중요한 특징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덩어리를 만들어 단단하고 깊게 자리 잡는 속성이 있다는 말이다. 바위를 잘라 내거나 딱 달라붙은 게를 떼어내는 것이 쉽지는 않을 일이다. 간혹 암 치료를 하는 의사단체를 표현하는 휘장을 보면 `게`에 `칼`이 꽂혀 있는 그림을 볼 수 있다. 다 이런 연유다.
암적인 존재라는 말이 있다.
암이라는 말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표현이다. 이제 암은 병 자체를 넘어서며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었다. 물론 사람들이 이 표현을 쓰는 경우는 암환자와 관련된 상황에서 쓰는 경우는 대부분 없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 혹은 고질적인 사회 문제를 비유할 때 많이 쓰는 단어다. `암적인 존재`라는 표현이 암수술을 하는 의료인의 입장에서는 별로 반갑지는 않다. 쉽게 고칠 수 없는 절대 악의 개념 혹은 공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일단 부정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암이라는 병이 불치병의 대명사로 치부되던 시절에 생겨난 말인 것 같다. 하지만 현재의 의료수준에서 모든 암을 불치의 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암의 종류에 따라 치료의 결과도 다르고, 또 암이 진행도에 따라서 생존율이 달라지기도 한다. 또 암을 한꺼번에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더라도 관리가 가능한 경우도 있어 암을 만성병이라는 개념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정상인의 몸에서도 암세포는 늘 만들어 진다. 흔히 사용하는 `암적인 존재`라는 표현은 생각할 여지가 많고, 암환자가 흔해진 시대를 고려하면 최소한 나는 이런 문장을 사용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암환자는 더 이상 낯선 이름이 아니다.
암은 모든 척추동물에서 발생할 수 있지만 유독 인간에게 흔하고, 실제로 한 사람이 평생 동안 암이 발생할 확률은 30%를 넘는다고 한다. 장기 생존한 암환자도 흔하며, 조기에 진단되어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치료가 가능한 경우도 많이 늘었다. 하지만 암환자라는 말에는 여전히 불편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숙한 사회는 `차이`가 나는 것을 `차별`로 생각하는 오류를 엄중히 경계해야 한다. 더 나아가 배려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있어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말하는 배려 이면에 암환자를 차별하지 않았는지 한 번 되짚어 볼 일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라는 영역에 그들이 함께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병으로 쉬었던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고, 평범한 일상을 만드는 것이 더 귀중한 일이라는 것이다.
암이 왜 사람에게 잘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결론이 없다. 하지만 굳이 표현을 하자면 암은 유독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에게 친화적인 질병이라고 할 것이다. 왜 신은 생각하는 인간에게 암을 주었을까? 암에 대한 과학적 혹은 의학적인 관심이외에도 암이라는 말에는 여러가지 깊은 생각이 함께 녹아있다. 무력감, 절망 그리고 희망 또 회복과 재활 그리고 사소한 것의 소중함까지….
김정구 가톨릭대학교 대전성모병원 위암협진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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