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김영하의 단편 `옥수수와 나`는 정신분석학을 정치철학에 응용한 슬라보예 지젝이 사용해 유명해진 동유럽의 농담, 자신을 옥수수 알이라 생각하는 남자를 모티프로 한다. 소설의 주인공 박만수는 오랜 치료와 상담 끝에 자신이 옥수수가 아니라는 걸 겨우 납득하고 퇴원한다. 그러나 며칠 뒤 병원을 되찾는다. "닭들이 나를 자꾸 쫓아다녀요. 무서워 죽겠습니다." "선생님은 옥수수가 아니라는 거, 이제 아시잖아요?" "글쎄, 저야 알지요. 하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지젝은 이 농담을 통해 믿음은 주관적이지만 외부 요인에 의해 객관화되고 물질화되는 점을 밝힌다. 김영하 역시 자본주의 시장과 권력에 의해 예술가의 생산 활동과 예술품이 물질화되는 운명을 문제 삼는다. 박만수는 옥수수가 아니라 아무리 주장해도 닭들에겐 소용없다. 본질과는 상관없이 닭들에 의해 `나`의 정체는 옥수수로 인식된다. 닭의 먹이가 아니라고 아무리 외쳐봤자 별수 없다. 그는 이런 외부 인식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그 그물망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다. 그는 닭들의 논리나 욕망에 의해 대상화된 물질로 환원될 뿐이다.

담배나 술에 대한 우리의 태도나 인식도 이와 비슷하다. 이놈들은 위험성에 비례한 만큼 파괴적이며 창조적인 기능을 매개한다. 가령 일부 작가들은 창의력을 담보로 술과 친화적이다. 주정뱅이 미국 작가를 엄선한 `작가와 술`이나 `작가와 알코올 중독`이란 책은 그 실체를 친절히 확인해준다. 엄선이라 한 것처럼 전수가 아니다. 알코올 중독으로 재능을 현현하고 탕진한 작가는 무궁하다. 피츠제럴드는 개츠비처럼 낭만적인 남자가 아닌 난폭한 주정뱅이고, 포우는 사촌 여동생이자 아내인 클램을 사랑한 만큼 죽도록 음주벽이 심했다. 예는 부지기수다.

군에서 고된 훈련이나 작업 중 잠깐 주어진 휴식시간의 끽연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이 취향을 공유하는 순간만큼은 위계 서열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이 순간 담배는 현실 상황과 맥락을 말끔히 무화시키는 마력을 발휘한다. 중고등학생들은 이놈을 향유하며 금기 위반과 억압에 반항하며 쾌감을 맛본다. 여성들에게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 논리를 전복하려는 도발적 상징 행위로 표상된다. 옛날 젊은 여성의 흡연이 자유로운 공공장소는 공항이나 대학 캠퍼스였다. 공항과 대학 캠퍼스의 장소 특정적 의미를 추론하면 납득 가능하다.

특이한 점은 두 놈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현격히 다르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담배는 술보다 의미가치 추락이 현저하다. 담배 갑의 흉측한 사진처럼 파멸을 불러오는 악마이며, 극단적 혐오 대상이다. 이에 비해 주취중 범죄는 감경 사유일 때가 있고, 취중 실수나 무례는 술 먹고 그럴 수도 있지 뭐! 아주 관용적이다. 간접흡연의 피해가 있기는 하지만, 흡연은 최소한 직접적으로 남을 해하는 끔찍한 범죄를 유발하지는 않는다. 담배에 취해 범죄를 저질렀다는 얘기는 들어본 바 없다.

이런 관대함에 비해 담배에 대해선 가혹하다. 담배는 이데올로기적 숭고의 사물이다. 숭고는 도취를 유발한다. 따질 것 없이 이놈은 건강과 생명을 해치는 만악(萬惡)의 근원으로 과잉 승격되었고, 다들 그렇게 믿는다. 그런 차원에서 담배는 모든 불행과 종말, 파멸의 근원을 대체하는 희생제물이다. 다 저놈 때문이야! 담배보다 더 억울한 놈은 대마초다. 담배, 술, 커피의 약물성분과 비교해 대마는 카페인보다 강화성과 독성에서 약간 높을 뿐 의존성, 금단성, 내성 등은 낮다고 알려져 있다. 사회적 해악이나 사망 요인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린 술과 담배를 마약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옥수수와 같다.

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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