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구 가톨릭대학교 대전성모병원 위암협진팀 교수
김정구 가톨릭대학교 대전성모병원 위암협진팀 교수
"당신은 위암에 걸렸습니다."

환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반응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아직 병의 진행 정도를 다 확인한 것이 아니고 지금은 치료방법이 좋아져서 예전 같지 않다"고 말을 해줘도 주눅 들고 실망한 얼굴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암이라는 이야기가 불치병처럼 그리고 절망이라는 단어와 동일시되던 시대가 있었다. 물론 현재는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다. 완치가 가능한 암이 많아졌고, 장기 생존한 암환자도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러시아 문호 솔제니친의 명작 `암병동`의 암울한 이야기는 현재 우리 암치료의 현주소라고 할 수는 없다.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관리가 가능한 질환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암은 중한 병의 대명사로 인식돼있다.

갑작스러운 암이라는 이야기에 환자들의 반응도 가지가지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많은 환자들은 암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자신의 잘못으로 병이 생겼다는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피하고 싶은 이 어려운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을까?`라는 물음에 대답을 찾아가면서 마치 병을 벌이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벌은 내가 잘못을 해서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암을 인지하는 상황을 `암 선고를 받았다`라고 표현하지 않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큰 병이 있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들었을 때 병을 받아들이는 이러한 논리를 의사인 나는 흔하게 접할 수 있다.

문인 이광수도 `참회`라는 글에서 `자신이 중병에 걸렸거나 가족이 그러할 때 진심으로 참회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순간보다 진실한 순간이라 말한다. 난산을 겪는 부인의 모습을 보고 아들과 부인의 생사를 세 번 참회하고 기원하고, 이질을 앓고 있는 열 네달 된 자식을 안으며 이 죄 없는 어린 생명은 죽어서는 안 된다며 아버지의 부덕함을 참회한다. 얼마나 간절한 순간이었을까. 일생에 이런 겸허하고 진심인 고백이 또 있을까.

큰 병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무서운 사장님, 깐깐한 부장님도 아니다. 우쭐거리는 젊음도 더 이상은 아니다. 그저 암환자일 뿐이다. 생로병사의 굴레를 지고 사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마냥 건강할 것 같던 자신감은 병에 걸리는 순간 이제 받아들이는 겸손함으로 바뀐다. 앞만 보던 자신의 삶이 이제는 잘못이 없었는지 뒤를 돌아보게 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단순한 진리가 진심이 되는 순간이다. `건강한 몸 그리고 소중한 가족들` 이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구나.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이제 누구라도 사색하기 좋은 시간이 됐다. 솔제니친의 소설 `암병동`에서 나오는 현자는 이런 말을 했다. `미련한 자는 가르기를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배우기를 좋아한다.` 암환자가 가지는 죄의식도 있는 반면 잘못을 하고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 탓을 하며 오히려 가르치려는 철면피 같은 사람도 있다. 어떻게 정반대의 해석이 나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에게 암환자의 마음을 배워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업적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포장하는 뻔뻔한 얼굴이야말로 정말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일 것이다.

암이라는 병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 있다. 실제로 위암으로 수술받은 환자들이 몸이 어느 정도 회복돼 일상으로 복귀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이번 일을 통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조심하며 살려고 합니다. 가족들이 많이 고맙더라고요."

의사로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암을 이겨낸 사람이든 암치료를 받는 사람이든 암으로 생사를 달리한 사람이든 최소한 환자에게 큰 잘못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암은 죄로 발생하지 않는다.

김정구 가톨릭대학교 대전성모병원 위암협진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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