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도 기초과학연구원 부원장
하성도 기초과학연구원 부원장
과학진흥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몫이다. 과학진흥에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나 그 결과는 곧 수익으로 연결되지 않아 민간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고, 과학지식은 누구나 접근이 가능한 공공재여서 시장원리에만 맡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진국들은 과학진흥을 위해 왕립학회(영국), 카이저빌헬름 연구회(독일, 현 막스플랑크 연구회) 등을 설립해 운영한다.

국가가 과학진흥에 힘쓴 역사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15세기 조선의 세종대왕이 국가정책으로 과학연구를 지원한 것이다. 당시 조선은 성리학 국가였으나, 세종대왕은 과학진흥으로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농업생산력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시간 측정을 위한 앙부일구를 발명하고 농사에 활용하기 위해 측우기를 개발한 것이다. 세종대왕은 계급사회였던 그 시대에도 출신 성분을 불문하고 노비 장영실, 무인 이천 등 인재를 파격적으로 등용하여 과학적 업적을 남길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세종대왕 이후 우리의 과학진흥 정책은 단절됐다. 반면 유럽에서는 16~17세기의 과학혁명이 18세기 중반 이후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20세기 중반까지 벌어진 우리나라와 선진국의 격차는 우리가 그 시대에 필요한 발전전략에 무지하여 과학진흥에 힘쓰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박정희 정부가 다시 과학진흥에 힘썼으며 인재 양성을 위해 1971년 한국과학원(KAIS, 현재의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설립했다. 입학생 전원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특례보충역 제도를 만들어 병역의무를 갈음해 주는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했다. 이에 전국의 인재들이 몰려들어 우수한 과학자와 엔지니어 집단으로 성장했다. 이전에는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부족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 당시에는 해외과학자를 유치해야 했으며, 이후에도 인재 수급에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국가가 나서서 이공계 전공자에게 혜택을 주고 비전을 제시하여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한강의 기적`도 이 `과학입국 기술자립`을 위한 풍부한 인재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이제 우리나라 이공계 R&D 투자의 규모는 세계 1, 2위를 다투는 수준에 이르렀고, 석·박사학위 취득자 수와 대학·연구소의 연구비 규모는 과거와 비교도 안 되게 커졌다. 그리고 세계에서 인정받는 국내 석학도 많아졌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고도성장 둔화, 제조업 후퇴, 외환위기로 인한 고용구조 재편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이어지면서, 현재 과학자는 비인기 직업이 되었으며 청소년의 이공계 기피 현상은 여전하다. 4차 산업혁명이 촉발한 전대미문의 변화가 일어나는 이 시대에 과학을 진흥하고 과학자를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를 다시 만들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시대발전을 선도하지 못한 과거의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직업군으로 구성되나, 적어도 과학에 열정이 있는 학생들만큼은 과학인재로 성장하여 과학을 평생의 업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세종대왕과 박정희 정부처럼 미래의 혜택과 비전을 제시하여 과학인재 양성에 힘써야 한다. 현재 이공계 대학의 교수와 연구소의 연구원을 정점으로 형성된 과학 분야 직업 구조를 당장 바꾸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과학인재들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직업경로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한 예로 필자가 재직 중인 기초과학연구원(IBS)에서는 다양한 경로로 연구에 참여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어 학부생, 대학원생, 박사후연구원, 연구위원, 초빙연구원 등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능력과 의지가 있으면 우주의 암흑물질, 뇌의 구조와 기능, 생명체의 노화 등 자연의 신비를 규명하는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세계적 석학인 김빛내리 IBS 연구단장은 한 인터뷰에서 `과학자는 하고 싶은 취미를 평생 하면서 월급까지 받을 수 있는 사치스러운 직업`이라고 했는데, 이렇듯 직업으로서의 과학자에 대한 혜택과 비전을 사회가 보장하여 더 많은 인재가 양성되도록 하여야 한다. 그들이 과학자로서 긍지를 가지고 과학진흥에 전념할 수 있는 사회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우리가 풀어야 하는 숙제다. 하성도 기초과학연구원(IBS)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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