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스마(Charisma, 신이 부여한 능력)로 소통을 좌지우지 했던 시대에서 이제는 맨투맨의 원탁회의를 쉽게 만난다.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종적인 소통은 같이 참여하는 횡적인 소통으로 넓어졌다. 강제와 강압은 구닥다리가 된 셈이다. 그러나 완벽한 제도란 없다. 너무 강력한 일인체제는 흥(興)하거나 망(亡)하거나가 분명히 갈라지기 쉬운 반면 횡적인 소통은 평등해서 좋지만 시간이 걸리고, 현재의 문제에만 집중 처방하는 단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세상에는 여-야처럼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이 있어야 한다. 그럴수록 종적이고 횡적인 소통을 충족시키는 사회구조 그리고 시민들의 성숙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이런 성숙된 시민의 요구조건에 가장 중요한 것이 소통능력이다. 나만 또는 남 탓만이 아닌 서로 소통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소통하는 문화는 가정과 학교에서부터 새롭게 출발되어야 한다.
소통은 체한 곳을 뚫는다. 이런 소통은 흙길이든 바닷길이든 하늘길이든 마음길이든 통해야 소통하는 것이다. 막혀 있으면 뚫어야 통한다. 그 길이 혈관일지라도 경화(Sclerosis) 되기 전에 뚫어야 건강하듯, 모든 막힌 길은 뚫어야 한다. 또한 소통도 예방이 필요하다. 길은 소통이 잘 되도록 미리미리 정비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인내다. 바른 길을 찾는 것이 삶의 멋, 그것은 소통을 위한 길, 그 길 위에만 멋들이 넘친다.
길은 약속이다. 약속도 종류가 많지만 소통의 길도 철저한 약속을 기본으로 한다. 길은 시작과 끝이 반복되는 약속이며 순(順) 또는 역(逆)방향의 길, 그 약속을 벗어나면 탈선이다. 우리는 평생 순간이라는 연속된 길속에 살고 있다. 항상 시작이고 항상 끝이다. 시작이 아닌 것도 없고 끝이 아닌 것도 없다. 늘 그렇게 시작과 끝은 한 몸, 동체(同體)다. 끊어지거나 끊을 수 없는 인연(因緣)이다. 결국 만나는 종점(終點)이고 회귀(回歸)다. 길은 그렇게 뫼비우스의 띠(Mobius strip), 돌고 도는 약속이다. 지키는 약속이 있는 길, 멋으로 가는 길이다.
가끔 길이 막힌다면 5천m를 걸어 넘나들었던 아슬아슬한 쓰촨성 차마고도(茶馬古道) 그 길 위의 생존본능, 청 고종의 칠순잔치에 갔다가 열하(熱河)를 다녀온 연암(燕巖)의 문화의 충격(Culture shock)인 일기, 카일라스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성스러움, 인도네시아에서 카누를 타고 8000㎞ 떨어진 마다가스카라까지 간 바닷길의 신비, 8C에 신라의 혜초가 평택항에서 배로 출발 오천축국(五天竺國)을 왕래한 귀의, 회심(Repent) 후 Tent maker로 일하며 2만㎞의 선교 여행을 하고 마지막 말 `예수!` 하고 순교한 사도 바울의 메타노이아(Metanoia), 별명이 최보따리이고 바닥인생이었지만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실행한 해월(海月)의 진정한 바다와 달의 길을 생각하라.
그리고 단출한 소통이 어려울 땐 비우러 옥천 향수, 비단 금빛강가 금강(錦江)의 향수(鄕愁)길, 특히 청마리를 지나 가덕리의 숲에 안긴 강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라.
따뜻한 배려와 품위의 그 길 위에. 활활 소통!
송선헌 미소가있는치과 대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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