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주 안전성평가연구소 부소장
윤석주 안전성평가연구소 부소장
라듐걸스, 새로 등장한 걸그룹이 아니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미국의 야광시계, 계기판 제작회사에서 일하던 중 라듐에 노출되어 암, 턱괴사, 재생불량성 빈혈과 같은 중병을 얻은 소녀들을 말한다. 라듐은 1898년 마리 퀴리(Marie Sklodowska Curie, 1867-1934)와 남편 피에르 퀴리(Pierre Curie, 1859-1906)에 의해 발견됐다. 당시 x-선과 더불어 굉장한 발견으로 여겨지며 질병 치료, 특히 암치료에 사용됐고 방사성 치료의 새 시대를 열었다. 또한 라듐은 신비한 빛을 내는 물체로 많은 사람들에게 신비로운 물질로 관심을 받고 있었다. 퀴리부부는 이 물질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게 되었지만 결국 라듐에 장시간 노출돼 병을 얻게 된다.

라듐걸스로 불리는 어린 소녀들이 일하던 곳은 미국의 뉴저지주에 위치한 미국 라듐 회사(U.S. radium corporation)였다. 이 회사는 라듐성분이 들어간 야광페인트를 이용하여 군용 야광시계, 계기판을 제작하였다. 십대 중반에서 이십대 중반의 여성 근로자로 구성된 이 회사는 마치 교실처럼 꾸며진 공장에서 작업을 했다. 실제 기록 사진을 보면 어린 소녀들이 교실에서 수업을 받는 모습처럼 보인다. 야광페인트를 가는 붓에 묻혀서 시계 숫자판에 덧칠을 하는 소녀들은 뭉툭해진 붓 끝을 혀에 대고 뾰족하게 하며 작업을 계속해왔다. 이러던 중 건강에 이상을 발견한 소녀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게 되었다. 턱뼈가 괴사되거나 입안에 궤양이 생기는 등 이전에 보고되지 않았던 질병이 발견된 것이다. 처음에는 성냥공장의 인에 의한 병이거나 매독에 의한 증상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이 특이한 질병을 끈질기게 연구한 의료진에 의해 라듐이 원인으로 지목되게 된다. 회사측은 완강히 부인하며, 소녀들의 질병과 라듐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이 사용한 야광페인트의 성분도 밝히기를 거부했다. 회사측의 방해로 소녀들은 변호사조차 선임하지 못하며 회사를 고발하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14년간의 공방 끝에 1939년에 비로소 라듐에 의한 질병임을 인정받게 되고 보상을 받게 된다. 당시 라듐노출로 사망한 소녀들은 50여 명에 달했다. 이 사건은 후일 책으로도 출간됐고, 2018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산업독성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됐고, 안전한 사업장에 대한 인식이 개선됐다.

다시 100여 년이 지난 현재 시점을 둘러보자. 2007년에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 씨는 11년이 지난 2018년에야 작업 환경과 질병의 인과관계를 인정받게 된다. 삼성전자는 관련 사업장에서 발생한 건강유해인자에 대한 관리부실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으로 사과했다. 또한 2011년에는 우리 사회를 경악하게 했던 가습기 살균제에 의한 사망사례가 알려지게 된다. 가습기 살균제에 의한 폐손상은 여러 연구결과와 역학조사를 통해 밝혀지게 됐다. 환경부에 신고된 피해건수만 6000건이 넘고 사망자도 1500명이 넘는 매우 심각한 사건이다. 가습기 살균제의 주성분 중 PHMG와 PGH는 인과성이 인정되어 제조기업에 유죄가 선고되었으나 다른 나머지 두 성분(CMIT·MIT)을 주로 사용한 두 기업에 대해서는 인과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져 무죄가 선고됐다. 후자의 경우 현재 1심을 마치고 2심이 진행될 예정이다. 과학적 실험에 기반한 증명과정이 인과관계를 밝히는데 부족하다는 판단이 아쉬울 뿐이다.

기업은 이윤추구가 최선의 가치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점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시간이 흘러도 그다지 바뀌지 않는 것 같다. 한 세기 동안 수많은 라듐걸스들이 있었다. 길고 외로운 싸움에 우리의 따뜻한 관심과 응원이 필요하다. 과학적 인과관계 증명은 우리 독성학자들의 몫이다. 윤석주 안전성평가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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