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페르소나(persona)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배우의 가면에서 유래한다. 알다시피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는 가면을 쓰고 연기했다. 영어 `개인`(person)도 여기서 유래한다. 페르소나는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융의 분석심리학, 여기서 페르소나는 한 개인이 사회와 관계를 맺고 적응하는 자아의 기능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페르소나는 사회적 관계에서 인간이 자신을 그 무엇으로 보이도록 기능하는 장치다. 우리는 사회생활에서 어떤 상황이나 위치에 따라 그에 적합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처세를 위해 가면을 바꿔 써야 한다.

가면은 자기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자 하는 변신 욕망과 연관되기도 한다. 가면을 거짓 얼굴이라 말하는 것처럼 가면은 변장 기능을 갖는다. 이처럼 가면은 보편적인 변신 욕망과 밀접해 있다. 가면이 연극의 분장구로 쓰일 때 가면을 쓴 배우는 자신의 정체를 벗어나 다른 인격이 된다. 그래서 가면은 비밀과 기만과 위선이 내재한다. 둔갑이 암시하듯 인간의 이중성이 내재한다. 사정이 이런지라 인간 탐구의 문학은 가면으로 표상되는 외양과 내면의 모순된 이중성을 폭로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로 많다. 가면 벗기기와 쓰기로 요약할 수 있는 최치원의 `고의`에서부터 이청준의 `가면의 꿈`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를 모티프로 한다.

그런가 하면 가면은 그것을 씀으로써 자기 은폐와 행동의 자유를 얻기도 한다. 가면을 씀으로써 인간은 금기를 깨는 위반과 쾌감이 가능하다. 예컨대 `도깨비감투`나 `투명인간` 이야기, 여기에는 자유의 문제를 규율과 금기, 즉 견고한 현실원칙을 깨려는 일탈과 위반의 심리가 숨어 있다. 가면무도회의 경우도 마찬가지, 성적 파트너를 바꾸는 일탈과 위반의 유희적 놀이에 가면은 면책특권을 준다. 자기 은폐는 금기와 위반, 그에 따른 자유의 즐거움을 매개하는 심리적 기저를 제공한다. 역설적이게도 이 유희적 가면은 `쾌걸 조로`, `브이 포 벤데타`, `탈레반`, `IS`, `KKK단` 등과도 심리 기저를 공유한다. 이 정치 종교적 반군, 체제저항, 인종주의자들이 뒤집어 쓴 탈도 결국 자기은폐가 가져다주는 심리적 자유를 정치적 저항과 금기 위반의 메카니즘으로 연결시킨 사례다.

매체철학자 귄터 안더스에 따르면, `사실`(fact)이란 단어는 라틴어 `factum`(만들어진)`에서 유래한다. 사실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지는 한 인물의 공적 이미지는 현대판 가면에 다름 아니다. 특히 정치인을 비롯한 유명인이 지닌 사실(본성)은 미디어가 만든 이미지의 가면 속에 숨겨진다. 미디어가 만든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한다는 보드리야르의 명제를 생각하면 미디어를 통해 형성된 이미지는 가면, 곧 인격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허망하다. 아리스토탈레스는 비극의 주인공이 파멸을 통해 제 운명을 깨닫는 것을 `발견`이라 했다. 미디어의 이미지를 쓰고 존재성을 획득한 유명인들이 몰락할 때, 그들도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처럼 제 운명을 깨닫고 허망함을 발견했을까?

눈물은 가면을 뚫고 나오는 영혼의 육체적 분비물이다. 눈물은 인간 영혼의 내적 고통과 상처와 슬픔, 깊은 심연의 진실성을 고백하는 가시적 기호다. 영혼의 고백이므로 눈물은 타자에게 어떤 진정성이나 연민의 감정을 유발한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곤경에 처했을 때 미디어 앞에서 종종 눈물을 글썽인다. 압권은 노무현이었다. 이 눈물의 고백을 또 다시 만났으니, 윤희숙 의원이다. 그는 겉과 다르게 주변을 둘러싼 여러 의혹이 일자 전격 사퇴를 선언했다. 눈물, 결백하지만 정권교체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분노와 결기어린 명분은 대단했다. 눈물에 감동했는지 당 대표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거렸다. 억울한 누명에 의해 희생당하는 비극의 주인공이란 뜻일까? 이미지 정치를 완성하려는 걸까? 눈물 또한 가면 같아서 정체는 알 수 없다. 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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