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학 변호사(흰물결아트센터 대표)
윤학 변호사(흰물결아트센터 대표)
며칠 전 네덜란드에서 온 그를 처음 만났다. 한국에 왜 왔느냐고 물었더니 반도체에 회로를 넣는 첨단장비 업체인 유럽 본사에서 삼성에 기술 지원하러 왔다고 했다. 그 첨단장비가 없으면 삼성도 TSMC도 반도체를 못 만든다고 했다. 자기 회사는 세계 시장 점유율 백 퍼센트라서 `경쟁자가 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경쟁자가 없다!" 그의 말에서는 자부심이 넘쳐났다. 그러나 기술은 발전하지 않는가. 언젠가는 그 회사에도 경쟁자가 생길 것이다. 당분간 경쟁자 없는 회사에 다녀도 저렇듯 의기양양한데 그가 언제나 경쟁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면?

나는 대학 졸업 후 어두컴컴한 고향 집 구석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사법시험 수석이니 최연소니 3관왕이니 하며 신문에 오르내리는 친구들을 보면 내 자신이 더욱 초라해졌다. 내가 뒤늦게 합격한들 친구들 뒷자리만 쫓아다닐 것 아닌가. 이미 경쟁에서 뒤처진 인생이었다. 법학 책을 펴면 머리만 아파 왔다.

어느 날 집 안에 있던 낡은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가치에는 경쟁 가치와 비경쟁 가치가 있다." 그 한 문장이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돈, 권력처럼 경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쟁 가치는 이 세상에 한정되어 있는데, 아름다움이나 선함은 공기처럼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는 비경쟁 가치라는 것이다.

내가 1등을 차지하면 남이 못하는 것은 분명했다. 순간 나는 내가 갖게 되면 남이 갖지 못하는 경쟁 가치를 위해 발버둥 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세상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해도 남들 역시 얼마든지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다! 내가 미소를 보내도 누구나 미소 지을 수 있듯이… 그러고 보니 나는 뒤처진 인생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에게 줄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어릴 적 오르던 뒷산 바위를 찾았다. 먼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물결에 반짝이는 햇살이 안겨 왔다. 바람과 햇살은 태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수천 년 전에도 너처럼 이 바다를 바라본 소년이 있었다고. 수천 년 후에도 그런 소년이 있으리라! 내 몸에 황금빛 날개가 달린 것 같았다. 나는 하늘을 향해 힘껏 날아올랐다.

그 어둡던 방에도 불이 켜졌다. 나는 드넓은 바다를 보며 자란 사람이 아닌가. 내 공부가 나에게도, 남에게도 도움이 되도록 하자! 딱딱한 법서를 읽어도 가슴은 부드럽기만 했다. 내 공부가 나를 드높이려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정말 가치 있게 쓰일 거라 생각하니 공부도 재미있었다. 그해 나는 고시에 합격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변호사도 누군가를 이겨야만 했다. 변호 일에 지쳐 돌아온 날, 밤을 새워 음악을 들었다. 베토벤 음악에는 신의 음성이 들어있었다. 내 영혼을 울리는 고결한 음성이. 어느 새벽 베토벤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인류에게 음악으로 큰 선물을 주었다. 너는 무슨 선물을 주겠느냐?"고. 법정에서 이기는 데 힘을 쏟고 있는 나의 삶과 인류에게 끊임없이 사랑과 평화를 주는 베토벤의 삶이 다가왔다.

그렇다! 누구나 사랑과 평화의 선물은 줄 수 있지 않은가. 고운 말을 쓰는 것, 정직하게 일하는 것, 정성 들여 만든 음식으로 가족에게 기쁨을 주는 것… 이 세상에는 경쟁하지 않고도 누구나 만들어낼 수 있는 가치들이 너무도 많았다. 나는 그 길을 가기로 했다. 상대를 공격하는 변호사 일을 그만두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종이책이 사라져간다는 시대에 나는 글을 쓰고 `월간독자 Reader`와 뮤지컬을 만들기 시작했다. 먼바다의 바람과 햇살은 이 시대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에 더 필요할 것이기에.

그런데 신기한 것은 손해 볼 것이 뻔한 일에 뛰어들었는데 오히려 더 풍요로운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경쟁 가치를 향해 가면 경쟁 가치까지 덤으로 따라오는 경험을 수없이 하며 믿음도 생겼다. 이 믿음이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보물이다.

다음주 그 네덜란드 친구가 내 사무실에 오기로 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찾은 보물을 말해주고 싶다. `경쟁자가 없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아예 `경쟁하지 않는` 삶에 그가 더 자부심을 갖게 된다면 그에게도 황금빛 날개가 달리지 않을까. 그와 나란히 저 푸른 하늘을 날고 싶다. 윤학 변호사(흰물결아트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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