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도 기초과학연구원 부원장
하성도 기초과학연구원 부원장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관념론자답게 한 시대의 정신문화를 나타내는 `시대정신 (Zeitgeist, 차이트가이스트)`이 존재하며, 인간은 그 시대정신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한다고 했다. 이는 철학뿐만 아니라 역사학, 법학, 경제학 등으로 확대됐고 과학에서도 시대정신의 영향은 크게 나타났다. 이에 따라 많은 과학 연구소들이 시대정신에 따라 탄생했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회(Max Planck Gesellshaft)의 전신인 카이저빌헬름연구회(Kaiser Wilhelm Gesellschaft) 설립의 시대정신은 부국강병이었다. 연구회가 만들어진 1911년은 온 유럽이 제국주의 질서로 재편되던 시대였다. 황제 빌헬름 2세의 꿈도 독일을 대영제국처럼 발전시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과학의 힘이 필요하다고 보아 칙령을 통해 황제의 이름을 딴 국가 연구소를 설립했다. 우리나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설립도 시대정신에 의한 것이었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기술연구소 설립 지원을 미국에 강력히 요청했다. 미국 정부는 이에 부응해 복사기, 원자로 핵연료봉, 제트엔진 타이타늄 합금 등을 개발한 바텔기념연구소(Battelle Memorial Institute)에 설립 지원을 맡겨 이듬해 KIST가 출범했다. 이렇듯 국가 발전의 브레인으로서 성장과 혁신을 이끈 막스플랑크연구회와 KIST의 설립에는 당면한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읽고 준비한 국가지도자들의 선견지명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지난 7월 1일 기초과학연구원(IBS) 산하에 출범한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도 시대정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경제발전에 과학을 활용하는 것이 과거의 시대정신이었다면, 앞으로는 바이러스, 기후변화 등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국민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과학의 새로운 시대정신이 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이를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사태 초반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결국 백신을 개발해 낸 것은 미국, 영국과 같은 과학 선진국이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방역에는 성공했으나 백신을 선도적으로 개발하지는 못했다. 백신의 개발에 필요한 기초과학 지식의 축적과 경험이 충분하지 못한 탓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는 우리에게 부족한 바이러스 기초연구 역량을 갖추고자 일찍이 그 설립이 제안됐으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정부 부처 간 역할 분담 정리가 필요했고, 연구소 설립과 운영을 어느 기관이 담당할 것인지 고민거리였다. 또한 넉넉하지 않은 국내 바이러스 분야 연구 인력으로 인해 우수연구자 영입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학계, 정부, 국회에서의 토론과 모색을 거쳐 IBS가 연구소 설립과 운영을 담당하게 됐다. 그리고 세계적 석학들로 구성된 IBS 연구단선정평가위원회의 엄정한 심사를 거쳐 최영기 충북대 의과대 교수와 신의철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를 설립 멤버로 선발했다.

IBS는 두 가지 이유에서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를 운영할 적절한 기관이라고 평가된다. 우선 IBS만의 `석학 중심 중장기 기초연구 지원 방식`이다. IBS는 우수과학자에 대한 충분한 지원과 자율성 부여에 있어서 국내 최고 수준을 보장하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바이러스 연구와 같이 연구자 역량과 장기적 자원 투입이 필수적인 분야에 특히 적합하다. 둘째로 IBS에는 여러 기초과학 분야의 역량이 축적돼 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김빛내리, 고규영, 천진우, 이창준 단장들은 바이러스 전공자가 아님에도 코로나19 실체 규명과 대응전략 마련에 세계가 주목한 성과들을 냈다. 새롭게 출범하는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가 이들과 협력한다면 상당한 시너지를 기대해볼 수 있다.

이제 출범한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가 가야 할 길은 멀어 보인다. 국가연구소가 수행할 연구계획과 전략을 수립하고, 임계 규모의 인력과 장비를 신속히 갖춰야 하며, 연구소 건물도 건설해야 한다. 하지만 막스플랑크연구회, KIST와 같이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도 올바른 시대정신을 반영해 탄생했기에, 앞으로 임무를 달성하며 발전할 것을 믿으며 아낌없는 격려와 지지를 보낸다. 하성도 기초과학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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