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읍성 복원
전국 의병전투 도화선이자 천주교 박해 현장
역사적 고증 통한 복원으로 후대 역사교육 현장

홍주읍성 홍화문
사진=홍성군 제공
홍주읍성 홍화문 사진=홍성군 제공
홍성의 옛 지명인 홍주. 1000년의 역사를 자랑 하는 홍주는 고려의 명장 최영부터 사육신 중 한명인 성삼문, 3·1운동 민족대표 33인 만해 한용운, 독립운동에 앞장선 백야 김좌진, 전통춤의 대가 한성준, 한국 근대화단의 거목 고암 이응노 등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다. 특히 홍주는 일제시대 격렬한 항일 의병 전투가 벌어진 역사적인 곳이다. 일제는 홍주의 맥을 끊기 위해 홍주와 결성을 합쳐 지명을 홍성으로 바꾸고, 홍주동헌을 가로막아 건물을 지었다. 현재의 홍성군청이 그 건물이다. 켜켜이 쌓인 홍주의 역사는 홍주읍성이 품었다. 일제에 맞선 의병전투, 천주교 박해 등의 현장으로 홍주읍성은 오랜 시간 아픔을 감내해 왔다. 홍성군청사 이전을 계기로 옛 영광을 재연을 준비 중인 홍주읍성의 발자취를 들여다본다.

홍주읍성

홍주읍성이 정확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인된 바는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를 살펴보면 읍성의 둘레와 우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9세기에 이르기까지 홍주읍성의 규모와 시설에 큰 변화는 없으나 순조 때에 한계수가 수성을 했다는 기록과 순조 23년(1822)에 성을 2350척으로 확장·보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홍주읍성은 1900년 이후 1917년, 1959년, 1969년 3차례에 걸쳐 보수가 이뤄졌다 . 1972년에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돼 홍주성지, 홍주아문과 함께 사적으로 지정됐다. 성벽의 둘레는 최장 1772m에 달했으나 많은 구간이 훼손, 810m의 구간만이 남아있는 상태다. 성내 관아 건물이 36동이 있었지만 이중 동문인 조양문, 외삼문인 홍주아문, 동헌인 안회당, 여하정 등 4동의 건물만이 현존하고 있다.

의병전쟁 도화선 된 홍주의병

홍주의병은 1896년과 1906년 2차례 일어났다. 주 무대가 홍주읍성이다. 1986년 홍주의병은 홍주의 김복한과 이설을 중심으로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대해 일어났으나 홍주부관찰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3일 만에 끝났다. 10년 뒤 1906년 홍주의병은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전 이조참판 민종식을 중심으로 봉기했다. 의병들은 1906년 5월 홍주성을 점령했지만 일본군의 반격에 의해 의병 수백 명이 사망하고, 홍주성 주변 10리가 초토화됐다. 그 중 9명의 홍주의병 지휘부는 대마도로 유배를 당했다. 홍주의병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됐으나 항일의병을 선도한 대규모 무장투쟁이자 당파, 학파, 신분차이를 뛰어넘어 유생과 민중이 연합한 민족통합의 움직임으로서 이후의 항일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충남대 김상기 명예교수는 "홍주성전투는 을사늑약에 항거해 전개한 최초의 의병이며, 최대 전투로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을 폭발시킨 도화선이 됐다"며 "홍주성전투에서 살아남은 의병들은 충청지역 일대에서 광복회 활동에 참여하고, 3·1운동과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천주교 박해현장 홍주읍성

1791년(정조) 신해박해 때 원시장 베드로가 체포이후 정사박해(1797정조), 신유박해(1801순조), 기해박해(1839헌종), 병오박해(1846 현종), 병인박해(1866 고종)에 이르기까지 홍주에서는 끊임없이 천주교 박해가 이뤄졌다. 기록상으로는 212명이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비공식적으로는 1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측된다. 홍주순교성지는 내포지역에서 붙잡혀온 신자들이 홍주읍성으로 끌려와 처형됐다. 북두칠성 모양으로 여러 형태의 처형장 존재하고 있다. 홍주읍성 내 4개소(신앙 증거터3, 순교터1)와 홍주읍성 외 2개소(참수 순교터, 생매장 순교터)가 있다.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순교자가 나온 홍주가 순교의 핵심성지인 이유다. 홍주의 대표 순교자 복자4위는 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이다.

일제 잔재 청산 홍주읍성

홍주의병 후 일재는 홍주의 맥을 끊기 위해 홍주동헌을 가로 막아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이 현재의 홍성군청이다. 홍성군은 일제 잔재 청산과 홍주성 복원을 통한 옛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군청사 이전을 추진했다. 민간이 중심이 된 청사입지선정위원회가 5년 간 후보지를 공모하고, 토론회와 주민의견 수렴 등을 통해 주민 선호도가 가장 높은 곳을 최종 입지로 뽑았다. 군청사 이전은 전국 최초 주민투표 사례다. 신청사 입지는 옥암택지개발지구다. 신청사 준공 목표는 2024년이다. 총 사업비는 811억 원이다. 연면적 2만 739.57㎡에 지하 1층, 지상 7층 규모다. 주차장은 지하 112대를 포함, 427대로 승인이 났다. 김석환 군수는 "군청은 홍주읍성 문화재 보호구역 내에 6개동의 건물에 각 부서가 배치되다 보니 낡고 비좁아 군민들의 불편이 많았고, 일제가 동헌을 가로막아 홍주의 맥을 끊어놓기 위해 건립했기에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의미에서 청사 이전을 추진했다"며 "올해 실시 설계 후 2022년 착공, 2024년 완공이 되면 찬란했던 옛 홍주의 영광을 재현하고, 시 전환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주읍성 복원

홍주읍성은 2000년대 중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복원이 이뤄지고 있다. 당초 1772m에 이르던 성벽이 절반 넘게 훼손됨에 따라 보수 등을 통해 810m 정도를 살려냈다. 나머지 성벽 복원도 계획하고 있다. 동헌(안회당)과 여하정, 조양문, 남문, 북문 옹성 등 홍주읍성에 있던 시설물 상당수에 대해 복원 및 보수를 마쳤다. 홍주성의 역사를 알리기 위한 홍주성역사관이 들어섰고, 옥사와 우물, 정자 등 홍주성 역사공원도 조성했다. 객사지와 동헌지, 전영동헌 등 아직 많은 시설물 복원이 숙제로 남겨진 상태다. 그러나 현재 문화재 복원 추세가 역사적 고증 없이 추정을 통한 복원을 정부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사료라 필요한 시점이다. 홍성군 관계자는 "군청사 이전과 맞물려 홍주읍성 복원에도 힘이 실리게 됐지만 문화재청은 확실한 고증 없는 복원보다는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는 쪽으로 유도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군 청사가 이전이 되면 도심 공동화가 우려되는 상황이라 역사적 고증을 통한 홍주읍성 복원으로 후대에 역사 현장인 동시에 관광을 통한 지역경제도 살릴 수 있는 곳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박계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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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읍성 고지도
사진=홍성군 제공
홍주읍성 고지도 사진=홍성군 제공
홍주읍성 전경
사진=홍성군 제공
홍주읍성 전경 사진=홍성군 제공
홍주읍성 홍화문
홍주읍성 홍화문
홍주읍성 홍주아문
사진=홍성군 제공
홍주읍성 홍주아문 사진=홍성군 제공
홍주읍성 조양문
사진=홍성군 제공
홍주읍성 조양문 사진=홍성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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