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
장석주 시인
무더위로 입맛을 잃는 여름철 한 끼 음식으로 콩국수만한 게 없다. 콩국수는 봄가을에도 먹을 수 있지만 여름 콩국수만큼 그 진한 풍미를 느끼기는 어렵다. 콩국수 만드는 법은 단순하다. 백태콩을 찬물에 불려 한소끔 끓인 뒤 믹서에 간 콩국물에 국수를 말고, 채 썬 오이와 볶은 통깨, 삶은 달걀 반쪽으로 갈라 고명으로 얹는다. 오이나 통깨가 없다면 열무김치를 얹어 먹어도 그 조합이 나쁘지 않다. 얼음을 띄워 차가워진 콩국수 한 그릇을 먹고 나면 더위쯤은 거뜬하게 견딜 수 있다.

누구도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사람은 식물같이 광합성을 통해 스스로 영양소를 만들어낼 수 없는 탓에 생명 유지를 위해 외부 물질을 몸 안에 들여야 하는 까닭이다. 무언가를 먹는 것은 제 몸의 바깥에서 구한 물질을 몸 안으로 들여 몸의 일부로 바꾸는 일이다.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제 몸 안에 들인 음식으로 제 몸을 만드는 존재라는 점에서 사람은 평등하다. 음식은 생명 유지의 바탕이고, 건강과 삶의 질을 만드는 필요조건이라는 한에서 이것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넓고 크다.

"배추는 굵은 소금으로 숨을 죽인다/미나리는 뜨거운 국물에 데치고/이월 냉이는 잘 씻어 고추장에 무친다/기장멸치는 달달 볶고/도토리묵은 푹 쑤고/갈빗살은 살짝 구워내고/아가미 젓갈은 굴속에서 곰삭힌다/세발낙지는 한손으로 주욱 훑고//안치고, 뜸들이고, 묵히고, 한소끔 끓이고/익히고, 삶고, 찌고, 다듬고, 다지고, 버무리고/비비고, 푹 고고, 빻고, 찧고, 잘게 찢고/썰고, 까고, 갈고, 짜고, 까불고, 우려내고, 덖고/빚고, 졸이고, 뜨고, 뽑고, 어르고/담그고, 묻고, 말리고, 쟁여놓고, 응달에 널고/얼렸다 녹이고 녹였다가 얼리고//쑥 뽑아 든 무는 무청부터 날로 베어 먹고/그물에 걸려 올라온 꽃게는 반을 뚝 갈라 날로 후루룩/알이 잔뜩 밴 도루묵찌개는 큰 알부터 골라먹고/이른 봄 두릅은 아침 이슬이 마르기 전에 따되/겨우내 굶주린 짐승들 먹을 것은 남기고/바닷바람 쐬고 자란 어린 쑥은 어머니께 드리고/청국장 잘 뜨는 아랫목에 누워/화엄경을 읊조리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이문재, `우리가 잃어버린 연금술`)

음식 한 가지가 세상에 나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손과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가? 음식 하나하나에 이토록 다양한 재료와 이토록 많은 재료를 다루는 방식이 존재한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전통 음식을 조리하는 방식은 인류의 오랜 지혜가 응축된 것이다. 그것은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연금술이다. 그걸 눈 여겨 본 시인이 말하는 바는 무엇을 어떻게 조리해서 먹는가 하는 문제가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방식과 상관되는 일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잡식 동물이다. 독성이 없는 거의 모든 것을 씹고 삼켜 소화해낸다. 무언가를 먹는 일은 우리 삶의 방식과 직결되는 점에서 미각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던 지난 세기와 달리 먹거리는 더 많아졌지만, 다른 한편으로 음식 문화는 획일화되고 균일화되었다. 사람들은 생활방식이 빨라진 탓에 예전보다 더 자주 패스트푸드에 기대어 한 끼를 해결한다. 이렇게 된 건 다 미국 문화 탓이다. 미국이 퍼뜨린 패스트푸드는 음식의 재료, 조리 시간과 방식, 맛을 규격화한다. 오늘날 맥도날드는 패스트푸드의 표상이다. 맥도날드 음식은 똑같은 재료를 쓰고, 표준화된 조리 방식을 따르기 때문에 세계 어디서나 거의 똑같다.

전통 방식을 따른 토속 음식이 사라지고 있다. 다양한 풍미를 자랑하는 지역 음식이 가공식품이나 패스트푸드에 밀리는 건 안타깝다. 오늘날 돈을 으뜸으로 따르고 섬기는 몰가치적인 자본 중심의 세계관이 지배하는 시장 경제에서 살아남는 것은 더 싼 값으로 더 많이 공급하는 패스트푸드뿐이다. 패스트푸드엔 한창 제 철인 재료와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조리 방식이 끼어 들 여지가 좁아진다. 우리가 값싼 패스트푸드만을 찾게 될 때 우리 삶은 더 조악해지고 음식에서 얻는 미각의 즐거움 또한 볼품없이 쪼그라들 게 뻔하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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