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섭 한국무용가
황재섭 한국무용가
예술 중 특히 무용은 모방을 기본으로 한다. 스승의 춤을 관찰하고 따라하면서 스승의 춤을 모방한다. 무수한 모방의 반복과정을 통해 제자는 스승을 똑같이 흉내내는 복제의 수준을 점차 벗어나 자기만의 예술로 발전하게 된다. 모방을 넘어서 자기 것이 되면, 비로소 나의 예술을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예술 창작을 위한 모방을 미메시스(mimēsis)라 불렀다. 기본적인 현의 운지법조차 모르는데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곡을 창의적으로 해석해 연주할 수 없으며, 색 혼합의 초보적인 효과도 알지 못하고서 전람회에 내걸 유화를 그릴 수는 없다. 자신만의 예술적 감각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메시스의 과정이 필요하다. 대가의 테크닉을 모방하는 단계가 없으면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없듯 앞선 이들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플라톤은 미세시스의 원본을 자연으로 보았기에 예술의 미메시스는 자연을 재현할 뿐이며 그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원본을 능가하는 사본은 없듯이 예술은 자연을 완벽하게 복제하지 못하기에 플라톤은 복제를 거듭할수록 사본의 질이 떨어지는 게 당연하고 미메시스는 그럴듯한 모방조차 되지 못한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스승님의 춤을 전수받는 요즘 플라톤의 모방이라는 단어는 조금 그 의미가 다르다. 어릴 적 예술의 모방은 스승님의 춤을 복사하듯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이었다면, 자기만의 예술체계가 어느 정도 잡힌 지금의 모방은 아무래도 나만의 해석이 가미된다. 사람의 꼴이 다 다르듯이 스승님의 춤 언어는 그대로 전수받아도 내 몸으로 완성될 때는 내 몸의 모방이라는 한 단계가 더 추가되는 것이다. 마치 안무를 할 때, 보다 완성도 있는 장면을 위한 안무가 무용수의 장점으로 표현될 수 있게 굳이 나만의 동작 디테일을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큰 틀에서는 나의 안무이지만 무대에서 보여지는 것은 무용수들이기에 그들의 몸으로 안무가 재창조 되는 것이다. 즉 모방이 모방되고 복제가 다시 복제되어 변질된다는 플라톤의 시뮬라크르(Simulacrum) 개념처럼 전혀 가치가 없다는 그의 말과는 다르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들뢰즈(Gilles Deleuze)가 이야기한 지속성과 자기 동일성이 없으면서도 인간의 삶에 변화와 의미를 줄 수 있는 각각의 사건을 시뮬라크로로 규정하고, 여기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 된다. 하지만 복제가 원본과 차이없는 기술의 발전은 미메시스를 생략하기도 한다. 악기하나 다룰 줄 모르면서 컴퓨터를 이용한 `편집`만으로 대중가요를 뚝딱 만들어내기도 하고, 유트브를 통해 완성된 동작들을 흉내내며 올려지는 무용공연도 즐비하다. 그 결과물들이 과연 창의성을 확보했다고 할 수 있을까? 산을 올라가기 위해선 길을 찾아야 하고 먼저 걸어갔던 발자취 위에 내 발자국을 입혀야 한다. 경사가 가파르면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어야 하고 나만의 속도를 유지하며 컨디션도 조절해야 한다. 그리고 중간중간 지나온 길을 잃지 않게 확인해야 한다. 그렇게 가쁜 숨을 내쉬며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졌을 때 비로소 정상에서 경치를 즐길 자격이 생긴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한발한발 내딛는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이 특히 예술가들에겐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산의 경치는 보정된 사진 속 얼굴 뒤에서 일그러진 허상으로만 남을 수 밖에 없다. 황재섭 한국무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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