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남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국가참조표준센터장
박승남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국가참조표준센터장
우리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규정한 용어는 다양하다. 개인 성찰을 넘어 자신이 속한 종에 대한 성찰의 결과일 것이다. 베르그송은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라는 뜻에서 `호모파베르`, 하위징아는 놀이하는 존재로 `호모루덴스`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경제학에서는 오로지 경제적 합리성에 기초를 두고, 한편으로는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상정한 인간 `호모에코노미쿠스`를 제시한다.

이런 다양한 인간관은 동물계에서 호모사피언스를 탈출시켜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기 위한 지적 몸부림이다. 그러나, 제인 구달이 침팬지가 풀줄기로 흰개미를 낚시하고 돌멩이 망치질로 견과류 먹는 것을 관찰한 이후 호모파베르는 기각된다. 끝없이 놀아달라고 보채는 주인의 성화를 겪어본 고양이 집사라면 호모루덴스의 기각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고전경제학이 전제하는 합리적 경제주체로서 개인과 맞닿아있는 호모에코노미쿠스 또한 그 견고한 주장에 맹점이 드러났다. 2002년 데이얼 카너만이 심리학자로는 처음으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면서 각광을 받게 된 행동경제학의 연구결과로 호모에코노미쿠스도 그 토대가 무너졌다. 그 결과 중 하나가 손실회피성향이다. 게임 참가자 전원에게 1만 원권을 나눠준다. 사회자가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나눠줬던 1만 원권을 거둬들이고, 뒷면이 나오면 2만 원을 더 준다고 제안한다. 빈손으로 시작했으니 투자의 기대 수익은 2만 원이다. 그러나 대다수 참가자는 이미 확보한 1만 원을 지키는 다소 불합리한 결정을 한다.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를 종식할 희망의 백신 가운데 아스트라제네카와 얀센 백신에서 희귀 혈전 부작용이 보고되면서 일부 국가에서 사용이 중지됐다. 영국에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접종자 3300만 명 가운데 309명에서 희귀 혈전이 발생했고, 56명이 사망했다. 59만 명 중 1명이 사망한 셈이다. 대전 인구로 보면 3명 미만이 사망한 꼴이다. 대전경찰청에 따르면 작년 대전 지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62명 중 보행 중 사망자는 37명이다. 두 사례를 단순 비교하면 백신에 의한 사망 가능성은 우연히 길을 걷다 사망할 확률의 10분의 1에 못 미친다. 방역당국이 백신 접종을 적극적으로 권하는 당위성은 결코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본성에 내재한 손실회피성향 때문에 접종을 주저하며 방역당국의 애를 태우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20만 년 호모사피언스 진화 역사 중 과학이 안전에 관한 정보를 수치 데이터로 제시한 기간은 2백 년도 채 되지 않았다. 우리는 분명히 진화의 능력을 갖고 있지만, 진화를 가속할 능력까지는 타고나지 못한 모양이다. 과학적 데이터를 신뢰하고 행동하는 신인류, 소위 `데이터 인간`의 출현을 단기간에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냉철한 과학으로 무장하고 지구를 쥐락 펴락하며 다른 종의 생사여탈을 호령하고 있지만, 우리 내심은 초조하다. 생존을 위해 아직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한 어리석고 무력한 존재임을 절감하는 것 외에는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박승남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국가참조표준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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