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지난 번 칼럼에 이어 화제를 미국으로 선택한 계기는 전적으로 대통령과, 전직 총리며 야당 대표였던 분의 방미 덕택이 크다. 대통령의 대미순방은 자동강박반복적으로 추구되는 정치적 서사관습에 가까운 일이어서 전혀 새로울 게 없다. 우리 대통령이나 미국 대통령이 새로 취임하면 방미는 의례적으로 이뤄져 왔다. 미국 대통령이 우리에게 와 준다면 집권 여당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정치 서사겠지만, 그건 역학관계상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가야 한다. 백신이든 북핵문제든 무엇이 됐든 들고 가 만나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처한 정치, 경제, 군사, 안보 상황을 막론한 실존적 운명이다.

운명이 그런지라 대통령 방미 코앞에서 코로나19 백신 확보를 위해 도미한 황교안 전 대표도 눈길을 끌었었다. 그것 또한 새로울 게 없다. `대북전단금지법` 등과 같이 무엇이 됐든 미국 조야로 들고 가 호소하는 일 또한 반복되니까. 전직 야당 대표는 백신 확보 외교라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미국으로 갔다. 그는 미국 조야 및 제약사 지도급 인사들을 만나 1000만 회 분의 백신을 자당 소속 지자체장들 지역에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얼마 뒤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해리스 부통령이 우리나라에 우선적 백신 지원 논의를 한다며 방미 결실이 확인돼 큰 보람을 느낀다는 소회를 밝혔다. 그의 정치적 의도나 지역을 갈라 사유하는 방식은 너무 익숙하고 노출이 심해 새삼 언급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다만 육체든 정신이든 노출이 심하면 추해질 수 있다는 것만 말해두자.

그리고 그 전에 미 의회의 `대북전단금지법 관련 청문회`도 있었다. 이에 대한 논평 또한 구구하게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주사파 대부에서 북한민주화운동가로 변신한 김영환의 대담이 담긴 조선일보의 기사 한 대목이 스치듯 떠오른다. 그는 여기에서 2000년대 초 북한에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담은 CD나 USB를 많이 들여보냈지만 그런 정보를 접하고도 주민들은 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보이지 않았다고 토로한다. 우월하고 풍요로운 자유선진 문화선전으로 고난의 행군을 이어가는 독재체제를 전복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대북전단살포 역시 비틀스가 소비에트와 냉전종식에 기여했다는 모조신화를 신봉한다. 남한 민주화는 박정희의 산업화에 의해 가능했다 말하는 이들은 이 논리를 북한엔 적용 않는다. `삐라`는 구시대 유물, 정치적 키치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왜 그토록 미국에 끌리는가? 역사적으로 미국은 우리가 전적으로 복제해야 할 국가 모델 아니면 배척 대상으로 인식돼 왔다. 천사와 악마, 야누스의 두 얼굴이랄까. 1882년 대한제국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우리는 미국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는다. 조약체결 후 고종이 아더 대통령에게 보낸 답서에 `미국(美國)`이라는 이름을 처음 쓴 이후, 미국은 기의 그대로 `아름다운 나라`라는 초월적 기표를 획득한다. 또 다른 얼굴은 조약체결이 한참 지난 1905년 일본의 한반도 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가쓰라-태프트밀약`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다. 이후 애증과 은원(恩怨)의 관계는 파노라마처럼 연속된다.

히로히토의 `종전조서` 발표 후 서울 진주 직전 맥아더의 `포고 제1호`는 "본관 휘하의 전첩군은 본일 북위 38도 이남 조선 지역을 점령한다"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문학적 사례를 통해 본다면 미소공동위원회를 `세계에 민주주의의 씨를 뿌리고`, `세계의 민주주의의 꽃에 물을 주는` 승리의 해방자(권환), 구원군(김송), 천사(박노갑)로 칭송된다. 점령군이 아닌 해방자로서의 미국에 대한 인식, 우리 사회의 미국에 대한 무한한 선망과 호의적 태도는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더욱 견고해진다. 전후 친미반공 이데올로기의 내면화가 그것이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준 혈맹의 우방국,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빌리면 `아버지의 법`으로 등극한다.

물론 미국이 아름다운 나라만으로 인식된 것은 아니다. 일제 말 대동아공영을 기치로 삼던 일본과 적대관계의 미국은 식민 타자에게도 타도의 대상이었다. 이 시기 미국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친일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며, 친일반미 의식의 문인들을 비롯한 허다한 인사들은 대동아공영권을 찬양 선전하는 데 열을 올린 적도 있다. 그리고 지난 세기 비미(批美), 반미(反美), 철미(撤美), 축미(逐美) 의식이 언설적 권력를 획득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 경계는 와해됐고, 관계는 불확정적이며, 우상은 영원할 수 없는 시대다. 모든 극단과 일방은 폭력적인 데다가 볼썽사나운 키치를 연출하는 법이다. 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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