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
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
도널드 톰슨은 기억에 대해 연구하던 호주의 심리학자인데, 어느 날 강간범으로 지목됐다. 강간 피해 여성은 톰슨의 얼굴을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피해자가 유일한 목격자였던 상황에서 강간 피해자가 톰슨의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해냈다는 것은 그가 강간범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톰슨에게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강간 사건이 발생한 시간에 텔레비전 생방송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사건 발생 시간에 텔레비전에 나와 목격자 증언과 관련해 `인간의 기억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피해자는 목격자 증언에 대한 톰슨의 인터뷰를 보고 있다가 강간범에게 공격당한 것이었다. 그녀가 강간범에 대한 얼굴을 기억해내기 위해 사건을 떠올리는 순간, 실제 범인의 얼굴보다는 텔레비전에서 선명하게 봤던 톰슨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던 것이다. 톰슨은 기억의 왜곡에 대해 설명하다가 기억 왜곡의 피해자가 될 뻔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전에 한 번이라도 봤던 사람의 얼굴을 생각보다 잘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언제 어디에서 봤는지에 대한 기억력은 크게 떨어진다. 그 결과, 톰슨과 같이 무고한 사람을 사건 현장에서 본 범인으로 착각하게 되는 출처기억의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도널드 톰슨은 다행히도 생방송이라고 하는 매우 명확한 알리바이 덕분에 기억왜곡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행운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로널드 코튼은 강간죄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철창으로 향했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였던 피해자인 제니퍼 톰슨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코튼이 범인이라고 지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난 후에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바비 풀이라는 사람이 다른 범죄 때문에 잡혔는데, 여죄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제니퍼를 강간한 사람이 바로 자기라고 실토한 것이다. 경찰은 제니퍼에게 바비를 보여주고 다시 한 번 확인해보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제니퍼는 그를 처음 본다고 주장했다. 사건은 이대로 종료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 시간이 더 흐른 후에 미국에서 DNA 검사가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제니퍼 강간사건 현장에서 발견됐던 범인의 정액을 보관해 오던 경찰은 로널드 코튼측의 요청으로 DNA 검사를 실시했다. 검사 결과, 진범은 바비 풀인 것으로 밝혀졌다. 로널드 코튼은 억울하게 11년간 감옥에 수감됐던 것이다.

DNA 검사가 대중화되면서 미국에서는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던 사람들 중에 무죄로 판명돼 석방된 사람들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미국에서 DNA 검사 덕분에 무죄로 판명된 최초의 40개의 사건을 분석해보면, 그 중 90%에 해당하는 36개의 사건이 목격자 증언에 기초해 판결이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건들에서 유죄 판결을 이끌었던 목격자들은 자신의 기억에 대해 매우 확신에 차있었지만, 그들의 기억은 실제로는 심각하게 왜곡돼 있었던 것이다.

연구들에 따르면, 기억에 대한 확신의 정도와 기억의 정확성은 전혀 관련성이 없거나, 있더라도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매우 낮다. 그 이유는 다양한 사건이 우리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매우 미묘하게 기억에 대한 확신과 정확성에 차별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예컨대, 목격자에게 용의자들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경찰이 목격자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잘 하고 있습니다"와 같은 말을 하면, 목격자는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다는 것을 경찰이 확인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자신의 기억에 대한 확신은 크게 증가한다. 하지만 경찰이 격려해줬다고 해 기억의 정확성이 증가할 수는 없다. 따라서 기억의 정확성은 그대로인데, 확신만 커지게 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기억에 대한 확신은 기억에 대한 정확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 기억이 다른 사람의 것이든 나의 것이든. 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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