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섭 한국무용가
황재섭 한국무용가
공연과 다름없는 마지막 리허설이 중요한 이유는 최종 점검이기 때문이다. 만약 준비가 덜 된 채로 리허설이 진행되면, 이후 공연 전까지 시간에 쭞길 수 밖에 없다. 행여 문제를 해결 못 할 상황이 닥치기라도 하면, 불안감은 점점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공포로 전체 출연자에게 전이된다. 불안은 본능으로 발전해 실수의 예감으로 확장되고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 삼류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끝까지 디테일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혼자만 잘해서 되는 예술이 아니기에 공연이나 연습 때, 모든 출연진과 스텝들의 분위기를 세심하게 신경써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안무자나 연출자는 모르겠지만 필자의 경우 공연 전 마지막 리허설은 특별한 멘트없이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을 무대감독에게 맡겨 놓는다. 무용수들의 작은 허점이 보여도 나중에 말해줄지언정 리허설 중엔 흐름을 끊지 않는다. 그만큼 연습이 돼 있고 그들을 믿기 때문이다. 또한 웬만해선 필요한 스텝 외엔 아무도 객석에 들이지 않는다. 마지막 리허설은 혼자만의 작품 감상 시간이기에 불필요한 방해는 받고 싶지 않아서다. 꼭 2년 전 대전시립무용단원들과의 첫 만남 때 첫마디는 `나는 예술을 하러 왔다`는 다소 뻔한 이야기를 했었던 기억이다. 감독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작품을 하고 싶어 이 길을 선택했다는 호기로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필자의 감독 시간은 벌써 두 해를 넘기고 이제 마지막 공연의 리허설을 마주하고 있다. 단원들과의 첫 만남의 장소는 연습실이었지만, 헤어짐의 공간은 무대이다. 사람으로 만나 작품으로 이별할 수 있으니 예술감독 입장에선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필자는 그들에게 아름다운 작품들을 선물했고 반대로 그들과의 시간을 선물로 받았다. 공연 후 받아든 환하게 웃고 있는 꽃다발의 꽃내음이 모처럼 필자를 웃게 한다.

고개를 돌려 서재 책장을 바라보니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소설이 보인다. 십 수년 전 아무 생각없이 집어 들었던 그의 책에서 인정받기 위한 인간들의 존재가 불안을 초래한다는 너무나 원론적인 글귀가 새삼 마음에 박힌다. 제목도 `불안`이다. 이 책 첫 장의 정의는 `지위`로 시작한다. 높은 지위는 즐거운 결과를 낳는다. 자원, 자유, 공간, 안락, 시간이 포함되며 남들에게 먼저 배려받는다. 이런 느낌은 다른 사람들의 초대, 아첨, 웃음(썰렁한 농담일때도), 경의, 관심을 통해 당사자에게 전달된다. 하지만 지위로 인한 불안은 비통한 마음을 낳기도 한다. 무용단의 시스템 안에서 감독이라는 지위는 여러 가지 자유로움을 준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혁신 없는 지위의 일상은 위험하다. 자기도 모르게 예술가는 한 달 월급에 목매는 직장인으로 전락될 수 있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도 그랬고 위대한 철학자들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인간은 구속받을 때 행복하다. 하지만 구속받기 싫어한다. 인간은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자신을 알아가는 길이다.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 했다. 현재가 미혹스러울 때는 과거로 돌아가 봄도 옳음직한 일이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마지막 작품을 뒤로하고 대전 생활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또 다른 내일을 준비한다. 아쉬움의 메시지가 넘쳐나며 많은 이들이 송별회를 이야기한다. 고맙다. 하지만 헤어질 땐 구구절절할 필요가 없다. 좋은 작품의 리허설은 불필요한 말이 없다. 황재섭 한국무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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