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창규 목원대 영어교육과 교수
성창규 목원대 영어교육과 교수
수년 전 재독 철학가 한병철의 `피로 사회`라는 책이 회자 됐다. 푸코의 말처럼 과거 사회가 규율 사회고 사람들이 복종적 주체라고 한다면, 현대 사회는 성과 사회, 사람들은 성과 주체다. 금지, 강제, 규율 등 `부정성`으로 점철된 패러다임의 사회가 전자라면 냉전의 종식, 다문화주의, 질병의 효과적 퇴치 등 `긍정성`의 추구가 후자다.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긍정성의 과잉으로 사람들이 스스로 궁지로 몰아감을 지적한다. 즉 성과 주체는 자기 자신을 소모해 사회에는 자신을 낙오자로 느끼는 우울증 환자가 넘쳐나고 성과를 위해 뒤틀린 수단 중 하나인 약물도 불사하며 도핑 주체로 치닫는다. 도덕성과 윤리적 판단이 성과 수단으로 인해 뒤틀린 상황이며 현재도 이따금 목격되는 현상이다.

21세기는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등의 신경성 질환들이 사회를 지배한다. 피로 사회는 성과 사회의 또 다른 이름으로 개인이 자신을 위해 최대의 성과를 올리려 하다 스스로 학대하는 병리학적 상황이다. 액정과 스크린을 통해 모든 것을 손쉽게 정보·커뮤니케이션 대상으로 전환해주는 디지털 기술은 부정성 축소와 긍정성 확대의 주축일 수 있다. 보고 싶은 욕망과 보여주고 싶은 욕망을 규제하던 사회의 부정성과 도덕적 장벽이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또 모두 접근이 가능하고 비밀의 영역이 점점 사라지는 분위기를 그의 저서 `투명 사회`에서 전개한다. 그는 규정을 따르면서도 개인의 욕망을 일정 부분 발현할 필요가 있다는 의도로 균형 잡힌 부정성과 긍정성 추구를 주장하는 듯하다. 본 이론을 바탕으로 수년 전 허먼 멜빌의 단편 소설인 `필경사 바틀비: 월가의 이야기`를 분석한 논문을 쓴 적이 있다. 바틀비의 반복적인 대답인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는 상황에 따라 미묘하게 뉘앙스가 달라지고 진지한 상황에서 블랙 유머가 되기도 하며 여러 문학적 해석으로 변주된다.

나는 오래된 책 냄새를 좋아한다. 논문 자료를 찾기 위해 도서관이나 서점에 도착하면 책 향기와는 조금 다른, 기묘하고 좋은 기분이 들곤 했다. 이를 설렘과 긴장이라 표현해보겠다. 요즘 아이들에게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제가 처음이라서"다.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대부분은 `처음`이다. 아마 잘해야 한다는 다짐, 실패하면 안 된다는 압박 속에서 "처음이라 그랬다"는 말이 나온 건 아닐까? 삶이 사람마다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면 거창한 목표나 흔한 희망이 없어도 충분히 살만하다.

200년 전 즈음 미국 시인 롱펠로의 `인생 찬가`는 이런 상황에서 곱씹을만하다. 작품 초반을 보면 "즐거움도 슬픔도 우리의 운명적인 목표나 길이 아니고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저마다 행동하는 것"이 삶이라 나와있다. 중반에서는 "위인의 생애는 우리를 깨우치니 우리도 숭고한 삶을 이룰 수 있고, 우리가 지나간 시간의 모래 위에 발자취를 남길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롱펠로는 "우리 모두 일어나 행동하자, 어떤 운명에도 이겨낼 용기로 끊임없이 성취하고 도전하면서 일하며 기다림을 배우자"로 결론을 맺는다. 어찌 보면 흔하고도 고리타분한 훈화 말씀이다. 어제보다 나은 행동이라면 도전의 준비가 되기도 하고 용기의 밑거름이 아닐까? 분명 모든 행동이 그럴 수는 없다. 아니 불필요해 보였던 첫 경험이 큰 결과의 촉매가 되기도 한다. 쓸데없어 보였던 행동이 되레 자신감의 원천이 된다.

효율적인 영어학습에 대해 많은 이들이 묻는다. 정보가 넘치는 긍정성과 투명 사회로 언급되는 요즘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화면에 산재한다. 외국어니 단어장, 교재, 파일로 정리, 메모 등 자신만의 은밀한(?) 학습이면 좋겠다. "공부가 처음이라 떨지 말고"를 "처음이니 떨림을 느껴보자"고 말하고 싶다. 얼른 공부해서 성과 내는데 "압박받지 말고"를 "기다림도 배워보자"고 말하고 싶다. 노년에도 열심히 시를 쓰고 후학을 가르쳤던 롱펠로도 어린 나이에 처음은 두려움이지만, 나이 들수록 처음은 자신감이 되고 활력소가 된다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온고지신에서 보잘것없어 보여도 `자신만의 오롯한 새것`을 느긋하게 키우고 싶다. 성창규 목원대 영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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