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윤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김하윤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송나라 역사를 기록한 『송사』에는 조변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가야금 하나와 학 한 마리[一琴一鶴]가 전 재산일 정도로 청렴결백한 관리였다. 밤마다 의관을 정제하고 향을 피우며 `하늘에 고할 수 없는 일은 감히 하지 않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갔기에 다산 정약용도 자경(自警)의 본보기라고 치켜세울 정도였다. 그는 관원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어사의 직책을 맡아서도 권력에 굴하지 않고 모두에게 엄정한 잣대와 원칙을 바탕으로 부정한 관원들을 처벌했다. 상대의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엄격하고 공정한 판단을 한 성품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철면어사(鐵面御史)라고 불렀다.

반면 『북몽쇄언』에 나오는 진사 양광원은 뛰어난 학문과 재능에 비해 출세욕이 대단했던 인물이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는 윗사람의 부족한 허물에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고, 세도가의 회초리도 자청해 맞으면서 아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온갖 모욕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출세만 가능하다면야 어린아이에게 굽신거리거나 윗사람의 변도 핥아먹으면서 비위를 맞출 준비가 돼 있었던 것이다. 주변의 비난에도 태연자약하면서 오직 출세만을 목적으로 삼았던 그에게 당시 사람들은 `부끄러운 얼굴은 마치 열 겹의 철갑처럼 두껍다`고 말했다.

두 인물은 모두 철면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지만, 결이 다름은 물론이다. 지금은 후자의 부정적인 철면피만 더욱 회자되고 있는 세상이다. 낯가죽[面皮]이 쇠[鐵]와 같다는 의미의 이 말은 `파렴치`, `후안무치`, `인면수심` 등을 동급으로 나란히 묶을 수 있으며, 모두 `몰염치하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체면이나 부끄러움이 아예 없다는 것이다. 인면수심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철면수심(鐵面獸心)을 지니고 있어 두꺼운 철판을 뚫고 나온 수염의 위대함(?)에 경의라도 표해야 할 지경이니 말이다. 이들의 사전에는 인도(人道)나 인성(人性)같은 사람의 도리는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

지금도 수많은 철면피들이 버젓이 활보하는 철인(鐵人)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제자에게 갑질과 성추행을 일삼아 놓고 아직도 교단에 서서 잰 체하는 지식전달중개업자, 형언할 수 없는 범죄를 일삼고도 두 눈을 치뜬 포토라인의 마스크맨, 신분과 지위를 이용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복지부동의 공직자 등등, 일일이 나열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이들은 항상 부드러운 낯빛을 유지하면서도 은연중에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욕망[慾]이 능력[能]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체면과 자존심은 안중에도 없다. 이들에게 일말의 양심을 기대하는 것조차 사치스러울 정도다.

도덕적 인간인 양 코스프레를 하는 철면피들은 겉으로는 온화하지만 속으로는 차디찬 `외온내냉(外溫內冷)`의 피가 흐르고 있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 냉혈한의 족속들에게 관용의 면죄부를 주는 한 철인의 무리들은 계속 번식(?)한다는 것이다. 나이 어린 친구들이나 젊은 청춘들은 욕구와 욕망으로 무장한 이들의 낯가죽을 닮아가려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저 정도의 뻔뻔함은 있어야 한다며 잘못된 가이드라인을 설정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철인이 많아질수록 어른들의 부끄러움도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철면피 사랑>이라는 노래가 있다. `세상에 세상에 이럴 수 있나`로 시작하면서 있는 말, 없는 말로 흔들어 놓고 상처만 남기고 등 돌린 사람으로 묘사된다. 나를 떠나가려면 `잘못이나 빌고 가야지`라면서 다시는 이런 철면피에게 `마음 주지 않으리`로 마무리하는 노래다. 철면피들과는 상종을 안 하는 것이 우선인 듯하다. 나아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게 해주는 것이 상책이다. 지금 시대에 필요한 것은 자신의 언행에 부끄러움을 아는 조변의 당당한 뻔뻔함이다. 염치(廉恥)를 모르는 철인의 시대는 사라지고 수치(羞恥)를 아는 염치의 시대가 오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김하윤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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