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원 신부·대전교구 천주교 홍보국장
강대원 신부·대전교구 천주교 홍보국장
한반도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 240여 년이 되었다. 1784년 이승훈 선조의 세례로 조선에 천주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천주교의 시작은 그리 순탄하지 못하였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교리는 조선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부분들이 많았고, 그러한 부분들이 정치적인 부분들과 연계되어 천주교회는 그 시작부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지만, 당시에는 바닷길이 열려 있었던 내포지역(현재의 당진시 일대)을 통해 천주교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는 박해로 인해 국경지대의 검문이 강화되었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바닷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포지역은 천주교의 못자리처럼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필연적으로 박해의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의 반상제도의 불합리성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같은 사람임에도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했던 시대였다. 그것은 박해의 시기에도 여지없이 적용되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그나마 심문을 받고 형벌을 받으며 배교(종교를 저버리는 행위)의 기회(??)라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선택의 여지조차 없었던 것이다. 해미 무명순교자성지는 바로 그런 분들이 처형당한 곳이다.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 죽음의 상황 앞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살아갔던 이들. 흥선 대원군의 `선참후계`(미리 참수하고 나중에 보고)라는 지시에 따라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죽어간 곳. 정상적인 죽음이 아닌, 마치 조류독감에 걸린 닭과 오리를 살처분 하듯, 사람을 그렇게 땅에 파묻어 생매장 시키고 돌과 몸을 함께 묶어 물속에 생수장 시켰던 곳. 바로 그곳이 `해미무명순교자성지`이다.

이 해미무명순교자성지가 `해미국제성지`가 되었다. 무슨 차이가 있을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물론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갔던 우리 신앙선조들의 역사라는 측면에서는 바뀐 부분은 하나도 없지만, 그 역사를 배워야 하는 사람들이 더 광범위해졌다는 측면에서는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다시 말해, 한국의 신자들만이 공경하고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는 차원의 성지였다면, 전 세계의 천주교 신자들이 해미 순교자들의 삶을 바라보고 공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교황청에서 인준한 것이다. 마치 K-방역이 전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인정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순교자들의 신앙이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해미국제성지가 되었다는 것은 비단 한국 천주교회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산티아고 데 캄포스텔라로 향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예로 들어본다면, 이곳은 종교와 상관없이 한 해에 수 십만 명의 사람들이 이 길을 찾고 방문하고 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자신의 신앙을 돈독히 다져 볼 수 있는 여정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으로써 이 길을 함께 하기도 한다. 코로나19가 어느 정도 잠잠해 진다면, 해미국제성지를 방문하기 위한 많은 신앙인들과 더불어 관광객들도 우리 나라를 찾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한국천주교회의 기쁨이 되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우리나라와 지역경제의 선 순환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나라의 기쁨이 될 것이 분명하다. 종교를 떠나 많은 이들의 관심이 있기를 희망하며, 이 기쁜 소식을 지역민들과 함께 나누어 본다. 강대원 신부·대전교구 천주교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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