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멕시코 중앙 고원을 반경으로 발달한 아즈텍 문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정교하고 세련된 문명 중 하나였다. 이 찬란한 문명의 멸망에 대해 역사는 16세기 초 불과 수백 명 에스파냐 군대에게 허무하게 종말을 맞은 것으로 기술한다. 하지만 아즈텍 문명의 인구 95%를 전멸시킨 것은 선진 군사력도 서구문명의 우월성도 아니었다. 병리학적으로 단 수 백명의 에스파냐 병사가 옮겨간 바이러스로 족했다.

아즈텍 문명이 그랬듯 `코로나19` 등 각종 유행성 바이러스가 창궐할 때마다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바이러스 창궐에 인류는 다른 생물종을 무더기 생매장하는 패악질마저 서슴지 않는다. 21세기 첨단 문명세계에서 전염병에 관한 악몽의 서사는 영화에서나 만날 수 있는 SF호러가 아닌 현실이다. 시공간을 압축한 항공망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순식간 세계 곳곳에 퍼트렸고, 인류는 일순간 접촉 공포에 휩싸였다.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존재의 기습에 일상은 불안에 떨고 있다.

팬데믹 선언을 전후로 소환된 영화 가운데 스티븐 소더버그의 `컨테이젼(2011)`은 지금 상황을 이미 경험이라도 한 듯 가장 리얼하게 그린다. 서사는 홍콩 출장에서 돌아온 한 여인이 발작을 일으켜 병원으로 이송되지만 이내 사망하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곧이어 그녀와 접촉한아들과 사람들은 같은 증세로 죽음을 맞는다. 이 같은 상황은 앞으로 벌어질 불길한 사태를 예고하고, 그 암시는 지구촌 곳곳에서 현실로 나타난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사람들은 대책 없이 죽어가고, 일상은 삽시간 걷잡을 수 없는 공포와 광기의 늪에 빠진다.

가장 섬뜩한 요인은 바이러스가 접촉을 통해 감염된다는 설정이다. 모든 인간과 사물은 잠재적이며 절대적인 위험인자다. 불안과 공포는 실체를 알 수 없다는 데서 온다. 바이러스의 확인불능과 정체불명성은 상대적 안전과 절대적 위험 공간의 경계를 지운다. 이로써 바이러스가 있든 없든 일상의 모든 영역과 사물들은 절대적 위험인자로 인식됨으로써 불안과 공포심은 최대치로 확장된다.

"아무것도 만지지 마라." 영화 포스터의 카피처럼 인류는 접촉 금지의 시간을 통과 중이다. 대개의 재앙서사가 그러하듯 인간의 탐욕과 오만은 재앙을 부른다. 이 오래된 서사의 근원은 신학적 무의식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바벨탑 신화가 내포한 원죄의식이랄까. 이 영화도 괴(傀)바이러스의 출현을 인간 욕망의 신적 영역 침범에서 끌어온다. 마치 괴수영화에서 괴물 출현이 환경오염이나 유전자 조작, 생태계 교란이나 환경 파괴가 불러온 결과라는 문법이다.

이 영화 역시 인간의 오만이 재앙을 부른다는 모티브에 근원을 둔다. 물론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재앙서사가 대체로 그러하듯 영화는 인간의 오만과 밑 빠진 욕망이 불러올 수 있는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경고하면서도, 종국에는 백신 개발로 바이러스를 퇴치함으로써 다시금 인간 이성의 우월성과 과학의 위대성을 확인하는 인간 중심의 반신학적 전망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에서처럼 낙관적이지만 않아 보인다. 현대의학은 마법에 가까운 경지를 자랑하지만 호흡기를 통해 전염되는 각종 바이러스의 진화에는 무력한 꼴이다. 백신을 개발한다지만 바이러스는 환경에 맞게 진화하면서 인류의 생존과 문명의 이상까지 위협하는 상황은 그 자체가 호러다. 마스크는 접촉 공포의 의미 기호, 이놈은 인간이 결코 지구의 주인이 아닌 연약한 생물종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김홍진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