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주 안전성평가연구소 예측독성연구본부 책임연구원
윤석주 안전성평가연구소 예측독성연구본부 책임연구원
분명히 가짜인줄 아는 데 당당하게 내 눈앞에서 진짜 행세를 한다면 그 억울함과 황당함에 할 말을 잃을 것이다. 이런 억울하고 황당한 상황이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매일 일어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테오 콜본 (1927-2014) 박사는 `우리는 미래를 도둑맞았다`라고 외쳤다. 당장 당면한 현실이 아니고 미래를 도둑 맞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내용일까? 콜본 박사는 `Our stolen future(1996)`라는 책에서 내분비 장애물질에 의한 환경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위협을 소개했다. 이 책이 발간되고 전 세계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이후에 또 하나의 충격을 받았다.

이전에는 화학물질과 암에 관련된 인과관계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과학계와 대중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화학물질에 의해 내분비계가 무너지고 그 결과로 야생동물의 번식 활동이 중단되며 사람의 경우는 원인불명의 불임과 난임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콜본 박사의 발표 이전에도 화학물질에 의한 내분비 장애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약품에 의한 내분비 장애의 대표적인 예로 잘 알려진 디에틸스틸베스트롤(Diethylstilbestrol, DES) 성분의 조기 유산 방지 약물은 1940년부터 약 30년간 임산부들에게 처방되었다. 그 결과, 이 약물을 복용한 임산부에서 태어난 여아에서 어린 나이에 거의 발생하지 않는 생식계 질환이 발생하게 됐다.

실제로 1960년 이전의 과학적 지식으로는 임신기에 태아와 모체를 연결하여 산소와 영양공급에 관여하는 태반-장벽은 화학물질이 통과하지 못한다고 믿어왔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화학물질에 노출되어도 태반-장벽이 방어해주기 때문에 태아는 안전하다고 여겨왔던 것이다. 과학의 발전은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절대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이 한순간에 바뀌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지 않겠지만 콜본 박사는 `대물림 독물(hand-me-down poison)`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부모세대에 노출된 화학물질의 나쁜 영향이 자식세대에도 전해진다는 것이다. 다음세대에게 좋은 것만 물려주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독성을 물려줄 수 있다는 것이다. 콜본 박사의 경고는 우리 생활에 밀접한 것이어서 그 파장이 더 컸다.

콜본 박사가 늦은 시기에 연구자의 길에 들어서서 주목했던 것은 미국 북동부 지역 오대호 주변의 야생동물의 이상 성행동, 번식장애,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이었다. 단순하게 환경오염에 의한 영향으로 볼 수도 있었지만, 콜본 박사는 미국 전역에서 관련 연구를 하는 학자들과 정보를 교환하면서 이러한 비정상적인 현상이 화학물질에 의해 내분비계가 혼란에 빠진 결과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살충제의 규제와 다양한 환경운동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에 새로운 화학물질의 위협이 있다는 점은 콜본 박사에게 용기를 내게 했을 것이다. 살충제, 플라스틱 제품, 산업동물에 사용되는 성장호르몬, 생활용품 등 수많은 화학물질 중 내분비 장애를 유발할 수 있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그동안 내분비 장애물질 관련해서 수많은 정보를 얻었고 위험성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많은 연구를 통해 대체물질을 개발하고 내분비 장애물질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소개됐다.

하지만 아직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다. 매일을 살아가면서 이런 화학물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이런 위험요소를 인지하고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한다면 다음세대에 안전한 미래를 물려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윤석주 안전성평가연구소 예측독성연구본부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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