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표성 대전여성문학회 회장
강표성 대전여성문학회 회장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G.마르셀은 인류는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즉 여행하는 인간이라 정의했다. 여행에 대한 욕구를 인생의 본래 모습으로 본 것이다. 살기 위해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유목민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선택하여 길 위에 서 있는 나그네로 생각했다.

여행은 내게 있어 영혼의 비상식량이나 다름없다. 스스로가 현실에 불시착한 조난자 같을 때면 여행을 꿈꾼다. 가방을 꾸린다, 생각만으로도 몸과 마음은 오월 바람이 된다. 존재 자체로 길 위에 서 보자. 내가 딛고 있는 세상의 안쪽이 아닌 바깥쪽을 만나게 될 터이다.

요즘은 길이 막혀버렸다. 투명한 유리벽에 갇힌 듯하다. 코로나19 시절을 겪으면서 선조들이 즐겨했다는 와유(臥遊)를 떠올린다. 옛날 사람들은 내 집 마루에 누워 명승고적의 그림을 보며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으니 유람은 사치였을 터, 그런 식으로나마 숨통을 틔웠나 보다.

와유의 그림 대신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열어본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여행지의 사진들을 펼쳐놓고 지난 시간들을 되감는다. ‘방구석 여행자’가 된 셈이다. 교육 방송의 세계 테마기행이나 유투버들의 랜선 투어와는 다른 맛이다. 아무렇게나 가둬버린 시간들이 되살아난다. 투둑 먼지를 털고 일어서는 기억들, 지난 풍경과 추억이 나만의 곳간임을 깨닫는다.

여행지에서는 핸드폰을 찰깍거리기 바빴다. 수천 년의 역사와 문화를 사진 속 배경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여기저기 경쟁하듯 몰려다녔다. 그것들이 품고 있는 찬란하고 경이로운 모습을 스치듯 지나쳤고, 연민과 공감의 울림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잠자리채를 휘두르듯, 전리품을 낚아채 듯 풍경을 눌러 넣기 바빴다.

그날의 사진들을 천천히 읽는다. 낡은 돌층계, 이끼 낀 조각상, 현지인의 소박한 미소 등이 다시 보인다. 그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배경에 불과하던 여행지가 새롭게 다가오고, 꾸깃꾸깃한 채 눌려있던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천천히 음미하며 새로이 저장한다. 이제야 여행이 발효되고 숙성되려나 보다.

방구석 여행자가 되어 보니 지난 시간들이 감사하다. 참으로 당연하게 생각한 것이 실은 축복이고 은혜였음을 깨닫는다. 오늘도 한 줄기 바람이 되어 먼 시간 속으로 날아오른다. 강표성 대전여성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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