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화 대전문화재단 노사협의회 의장
이시화 대전문화재단 노사협의회 의장
내 인생 전부를 돌아보며 이렇게 조용하고 차분한 설을 맞았던 적이 있었는가. 보이지도 않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인류가 지금까지 지켜오고 만들어왔던 우리의 삶을, 문화를 송두리째 빼앗아갔다.

그 와중에 전해진 대전의 원로예술인 이인영 선생님의 작고 소식은 유달리 쓸쓸하게 느껴진 것은 비단 필자뿐 아니었을 것이다. 필자에게 이인영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지난 2015년, 담당하던 `대전원로예술인 구술채록` 사업을 통해 뵌 것과 몇 해 전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원로작가 초대전시를 관람했던 것이 어렴풋하게 남아있다. 겨울바람이 가시지 않은 쌀쌀한 날씨를 뚫고 들어간 전시장에서 이인영 선생님의 작품을 감상하며 미리 따뜻한 봄기운을 느꼈다. 전시장에는 그림뿐 아니라 소장품도 전시되어 필자보다 앞선 세대이긴 하나 옛 추억을 불러일으켰으며 흥미를 자극했었다.

이인영 선생님은 1932년 충남 부여 출생으로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힘들고 암울한 시대에도 선생님의 타고난 재능은 빛을 잃지 않았다. 그의 그림을 좋게 본 일본인 교사가 미술에 흥미를 갖게 했고, 취미로 조금씩 하던 작품활동이 되어 미술 교사가 되었다. 미술 교사로서의 삶은 그가 작품활동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가르치는 학생들은 실기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였고, 본인의 작품은 국회의장상을 받는 등 업과 작품활동을 분리하지 않고 기량을 마음껏 펼쳐내었다.

이후 대전 미술의 선구자인 이동훈을 만나 많은 작품활동에 많은 영감을 받게 된다. 유화도 그 무렵 시작했으며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출품하여 입선했다. 이어진 수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이인영 선생님은 1967년부터 민족기록화 사업에 참여했다. 먼 훗날 기록된 자료를 살펴보면 그 당시 정부에서 제공한 재료들이 매우 품질이 좋았으며 성모여자중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시절이었는데 학교에서도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의 작품이 현재 전쟁기념관에 소장된 `안융진 담판을 하는 서희`이다. 1975년에는 숭전대학교(현 한남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이후 1997년까지 교단에 서서 지역미술계를 이끄는 예술인들을 배출해내었다.

재단에서 담당 사업으로 만난 이인영 선생님의 일생을 필자가 어떻게 소상히 알겠는가. 이는 바로 기록의 힘이다. 대전문화재단은 2014년부터 지역 원로예술인들의 삶과 활동상을 기록하여 대전예술사 연구의 기초자료 확보를 위한 `대전원로예술인 구술채록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대전예술계에서 30년 이상 활동한 70세 이상 예술인이 대상이며 건강상태를 고려하여 구술자가 선정된다. 이인영 선생님은 2015년도 구술자로 선정되어 전문연구원과 4회의 구술채록을 완료하였으며 현재 그 채록 영상과 채록 집이 남아있다. 필자가 이번 작고 소식을 계기로 채록집을 다시 꺼내 뵈니 불과 6년 전이었는데 매우 정정하셨고 얼굴에 인품이 오롯이 드러나 온화해 보였다. 작품에서 느꼈던 그 따스함이 그대로 묻어있다.

구술채록을 남긴 원로분 중 몇 분이 벌써 고인이 되셨다. 그럴 때마다 `작가로서 생애를 걸친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었을까.` 라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기록하지 않았다면, 조망하지 않았다면 그 소중한 작품들이, 우리의 역사가 어떻게 전해졌을까. 참 의미있다.`라며 위로한다.

이인영 선생님의 채록문 마지막에 연구자가 이런 질문을 한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가요?" 라는 질문에 "80이 넘은 나이에 계획이랄게 없다"며 "그저 여태껏 해 온대로 성실하게 내가 그리고 싶은대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어떤 시류에 휩쓸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이 변화가 빠른 시대에 이인영 선생님이 남긴 작품과 발자취 그리고 삶에 대한 철학은 대전 미술계뿐 아니라 대전사에서도 큰 업적으로 남겨질 것이다. 이시화 대전문화재단 노사협의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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