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욱 남서울대 교수·㈔충남도시건축연구원 원장
한동욱 남서울대 교수·㈔충남도시건축연구원 원장
서정은 `주로 예술작품에서 자기의 감정이나 정서를 그려냄`으로 정의되는 어휘다. 건축이 건축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행위 중 하나가 서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서정은 대부분 예술적으로 정제돼 표현된다고 생각하지만 반드시 정제된 아름다움일 필요는 없다. 미국의 유명한 그래피티(graffiti) 아티스트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의 작품은 거친 날 것의 낙서로 표현되었지만 그의 서정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고 많은 동시대 예술인들의 공감을 얻었다. 서정은 솔직함에 기반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지난 칼럼에서 이야기한 서사(敍事)는 정직함에 기반한다. 서정이 순간적 느낌의 표현이라 한다면 서사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쌓아온 기억의 발로다. 요즘 TV에서 집에 대한 프로그램들을 많이 방영하고 있다. 그 중 두어 프로그램들을 틈틈이 시청하는데 언제인가 봤던, 아이를 위해 교외로 이주한 한 가정의 주택 방문기에서 부엌 작업대 위 창을 통해 바깥 경치를 바라보며 이 집에 사는 보람을 느낀다고 했던 아이 어머니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아침 설거지를 하다 문득 바라보고 싶은 경치가 있어 가로로 긴 액자 같은 창을 뚫었다고 하는 말에 `그래 그러고 싶었겠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사실 그 부엌은 채광이나 환기가 충분히 이루어지는 곳이었고, 굳이 창문을 뚫지 않았다면 보통의 부엌들처럼 상부 장을 설치하여 수납공간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 바쁜 부엌일 도중에 흘낏 바라다 볼 경치를 위하여 상부장을 포기한 것이다. 그런 것이 서정이지 않을까 한다. 비록 순간에 그칠지라도, 비록 실리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솔직한 감정의 표현, 그런 것이 서정이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현실 속의 아이 어머니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서정을 잊고 산다. 우리의 도시를 보면 보이는 많은 집들이 서정을 상실하거나 복제되어 강요된 서정을 보여 줄 뿐이다. SNS 속 명소라는 곳들이 사실은 자신이 갖지 못하는 서정을 일시적으로나마 대신 차용할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은 약간은 씁쓸한 느낌마저 갖게 한다. 지어진 지 몇 년 지났지만 서정하면 떠오르는 집이 있어 잠깐 돌아볼까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축가 중 한 분인 정재헌 건축가가 설계하고 2015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도천 라일락집`이다. 서울 명륜동 성균관 근처 고즈넉한 분위기의 주택가, 고(故) 도상봉 화백이 1930년대부터 살던 터에 새로 지어 후손이 살고 있다. 도천 라일락집은 마당을 중심으로 창을 통해 서로를 볼 수 있는 한옥식 공간 구조를 차용하여 `ㄱ`자 형의 전벽돌 2층 건물과 오브제 같은 형태의 적벽돌 1층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거주자들의 삶을 안온하게 보호하며 행인들에게는 길 건너 성균관 건물들에서 느껴지는 색감을 연상하게 하는 동시에 형태적 대비를 이루어 묘한 어울림의 정취를 제공하고 있다. 집 주인과 건축가가 공유하는 서정의 표현이라 생각된다.

공간의 구성과 배치, 형태뿐 아니라 외벽의 재료를 다룬 디테일에서도 세심한 서정의 표현이 관찰된다. 전벽돌조 건물은 반듯한 원재료의 물성을 그대로 시공했으나 적벽돌 건물은 벽돌 쌓기를 하고 정으로 깨서 햇빛의 방향에 따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질감을 극대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세심하고 정성스러운 수작업의 결과이다. 이는 서정이 때로는 지극한 정성에 의하여 한층 더 극명해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건축주는 사실 이 터와 옛집을 처분하고 이사 갈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문화재보호구역 내에 위치한 데다 할아버지의 유산이라는 점 때문에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다가 "역사가 담겨 있는 장소를 후손들이 새 기억으로 보존하는 게 중요하다"는 건축가의 조언에 새 집을 짓기로 했다고 한다. 집의 당호인 `도천 라일락집`은 도상봉 화백의 호와 즐겨 그리던 라일락의 우아하고 편안한 느낌을 담고자 하는 의도를 엮어 지은 이름이다. 또한 집을 구상하고 짓는 과정을 집주인은 사진일기로 남겨 서사화하기까지 했다. 건축은 건물이 아니다. 물리적 형태로 빚어내는 서정이고 서사라고 볼 수 있다.

한동욱(남서울대 교수·㈔대한건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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