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윤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김하윤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재야의 실력자들이나 잊힌 비운의 가수들이 실력을 겨루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막을 내렸다. 기존의 오디션 방식과는 다른 포맷으로 출연자들을 익명으로 만나고 번호로만 부르는 방식이다. 익명에 가려져 있다 보니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기에도 충분했고, 출연자들은 최종 TOP10에 올라가거나 탈락이 되고 나서야 본인의 이름을 드러냈다. 이전까지는 번호가 이름인 무명자(無名者) 상태로만 존재한 것이다. 순위에 올라서 이름을 달고 부르는 노래는 오롯이 자신의 음악이 되어 시청자들에게 다가간다. 무명가수가 아니라 유명가수로 존재를 드러내면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하고, 보는 이들도 그제야 번호의 존재를 확인해가며 더욱 열렬히 환호하기 시작한다.

세상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다. 이름으로부터 존재가 시작된다. `하늘은 녹이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도 이름 없는 풀을 내지 않는다(天不生無綠之人, 地不長無名之草)`고 한다. 길섶에 풀 한포기조차도 이름을 지녔는데, 하물며 인간에게 있어서랴. 이름을 직접 부르거나 쓰는 것을 삼가서 피휘(避諱)할 수밖에 없었던 성인(聖人)이나 선왕(先王), 선조(先祖)들의 이름부터 천명장수(賤名長壽)를 믿었던 조선의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이름 하나하나에 묵직한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이유이다.

이름에는 희망과 기원이 담겨 있다. 자신보다 남이 더 많이 불러줄 수 있도록 받침과 획 하나에도 의미를 새겨 온갖 정성을 담아 낸다. 세상에 허투루 지은 이름이 없는 이유이다. 허튼 이름이 없기에 존재의 의미도 모두 소중하다. 내 것이지만 나보다 남이 더 많이 사용하고, 불릴 때 그 가치를 드러내는 이름, 모두의 이름이 명명(命名)되는 순간부터 생명을 시작한다.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이름을 불리며 의미 있는 존재로 다가왔던 꽃처럼, 우리는 누군가에게 꽃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를 부여하는 시작이었던 것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눈을 감을 때까지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것을 싫어한다.(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고 하였다. 근대 학자 겸 독립운동가인 이만도는 `무명자설(無名子說)`에서 "나이 마흔이나 쉰이 되도록 이름이 들리지 않으면, 이런 사람은 그것으로 그만 끝이다.(四十五十而無聞焉, 其終也已)"고도 하였다. 입신(立身)을 해서 양명(揚名)을 해야 부모의 이름도 세상에 떨칠 수 있었기 때문에 예부터 선현들이 최고의 선(善)이라고 신뢰하며 따르던 말이다.

이름값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름의 무게에 맞는 노릇이나 됨됨이를 말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라는 뜻으로도 해석한다. 임금과 신하[君君臣臣], 아비와 자식[父父子子]이 모두 그 `~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역할과 구실에 맞는 노릇이라고 공자도 말했다. 한마디로 `이름값하라`는 말이다. 사람으로서 자신의 이름에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다면 무명자보다도 못한 무영자(無影者)의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내가 잘해야 남이 빛내줄 수 있는 것, 우리는 자신의 이름에 얼마나 많은 가치를 부여하며 살까. 매 순간이 유명(有名)과 악명(惡名)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의 이름을 자랑과 명예, 또는 수치와 비극의 결과로 만드는 주체가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름은 호칭에만 머무는 형식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 자체를 보여주는 실질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한순간의 실수로 자신의 이름에 오명(汚名)과 누명(陋名)의 덤터기를 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올해부터 인생의 버킷리스트에 `이름값 하자`라는 항목 하나를 추가했으면 한다. 세상에 나와 부여받은 고명(高名)한 이름이 하루하루 유명(遺名)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앞으로 자신의 이름에 책임감을 갖고 살겠다는 젊은 출연자의 소감이 아직도 잔잔한 여운으로 남는다. 김하윤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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