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곤 배재대 실용음악과 교수
황성곤 배재대 실용음악과 교수
"여전히 내게는 모자란/ 날 보는 너의 그 눈빛이/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알 수 없던 그땐/ 언제나 세월은 그렇게/ 잦은 잊음을 만들지만……"

이것은 너무나 유명한 가수 이승환의 히트곡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의 가사 중 일부이다. 나는 여기서 "잦은 잊음을 만들지만"이 "잦은 ism"이라고 한동안 믿었었다. 정확한 진위여부는 가수에게 직접 물어보아야 겠지만 적어도 이 곡이 발표되었던 20세기만해도 정말 "잦은 ism"의 시대였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 ism이라는 것은 물론 독립적인 단어는 아니다. 어떤 철학적, 예술적, 정치적, 사고체계를 통칭하는 말에 ism이 접미사/suffix로 붙는다. 예를 들면 20세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행했던 예술사조인 "Futurism"같은 것들이 있다. 우리식으로 번역하면 "미래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빠르게 발전하던 기계화 문명이 유럽 예술인들에게 가져다 주었던 일종의 기술낙관주의이다. 특히 20세기는 그 잦은 ism의 풍년이었다. 열거해 보자면 "Futurism", "Cubism", "Neoclassicism", "Neoromanticism", "Postmodernism", "Impressionism", "Dadaism", "Surrealism", "Expressionism", "Fauvism", "Symbolism" 등등 예술계에만 해도 이렇게 많은 ism들이 오고 갔다. 말하자면 잦은 ism들이 잦은 잊음이 돼버린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어떤 하나의 ism이 형성되는 방식이 매우 자연스러운 것도 있고 다소 부자연스러운 것도 있었다. 여기 자연스럽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ism즉 사고체계가 당시의 외부적, 내부적 환경요인들과 잘 맞물려 하나의 "시대정신/Zeitgeist"이 되는 경우이다. 이러한 시대정신적 ism이 가장 강력하다고 할 수 있는데 예를들면 "낭만주의/Romanticism"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독일 중심으로 일어나 낭만주의는 당신 유럽을 지탱하고 있던 이성주의와 합리주의의 한계상황에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전 유럽을 휩쓸었던 프랑스혁명의 혼란은 인간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을 열기에 충분했다고 본다. 즉 인간의 내면과 개성, 감정과 광기등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가 이시점에서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인간 내면의 탈이성적 탐구는 이후 1차,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어 소위 "모더니즘"의 붐을 일으키고 더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렀고, 지금은 아예 탈이데올로기적 시대가 됐다. 반대로 다소 인위적인 ism으로는 이미 언급했던 미래주의같은 것이 대표적인데, 이러한 예술사조들은 탄탄한 철학적, 시대적 배경이 있다기보다 열정 넘치는 하나의 운동/Movement로 비추어진다. 20세기초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시인 필리포 마리네티(1876-1944)에 의해 주창되었던 이 예술사조는 당시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기계문명의 흐름을 반영하는 속성도 있지만 체계적 완성도에 있어서는 느슨한 감이 없지 않다. 이러한 ism들은 주로 위압적이고 인위적인 그들만의 선언문/Menifesto를 마치 출사표처럼 던지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열정이 넘치는 것이다. 1909년 "La Figaro"라는 신문에 발표한 그 선언문을 살펴 보면 "파이프로 덮개를 장식한 경주용 자동차-포탄 위에라도 올라탄 듯 으르렁거리는 자동차는 아름답다"며 기계문명을 찬양하고 있다. 황성곤 배재대 실용음악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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