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
미국 현지시각 1월 3일 미국 의회의사당에서는 연방 하원 취임 및 개원식이 열렸다. 한 여성이 우아한 한복을 입고 등장한다. 그런데 그녀의 피부색은 우리와 다르다. 지난해 11월 미국 워싱턴주(州) 10선거구에서 민주당 후보로 당선된 메릴린 스트릭랜드, 한국명 순자가 바로 그녀다.

붉은색 저고리에 짙은 푸른 색 치마 차림의 한복을 입고 맨 앞줄에 위치한 그녀는 이미 언론의 많은 관심을 모았다. 한국인 어머니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스트릭랜드 의원은 비록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두 살에 미국으로 가서 현지에서 자란 미국인이다. 하지만 그녀는 선거운동 기간에도 당당히 한국계 정체성을 자랑했고 마침내 16% 이상의 압도적인 표차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녀 외에도 세 명의 한국계 미국 연방 하원의원이 탄생했다. 하지만 그녀를 굳이 이야기하는 이유는 다른 세 명은 누가 봐도 온전히 한국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반면 스트릭랜드의 의원의 모습은 스스로 한국계임을 밝히지 않는다면 알아내기 어려울 정도다. 미국 국내정치에서 한국계란 것이 득이 되는 일도 아니기에, 그녀의 행보는 우리에게 한민족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대체로 `민족`이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혁명 이후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민족이라는 개념은 19세기까지는 잘 사용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구한말 발간된 국내 신문에서도 20세기에 들어서야 민족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동시에 민족의 개념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진화한다.

사전적 의미에서 민족이란 "일정한 지역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이다. 인종이나 국가라는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때론 가치나 문화적인 개념일 수도 있고, 때론 지역적 개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민족의 개념을 지나치게 한반도와 혈통에 몰입하고 있다. 그 결과 가치와 문화는 종종 간과된다. 우리의 일상생활이나 외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주변 곳곳에는 많은 아시아계 한국인과 혼혈인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가. 시야를 해외로 돌려보자. 먼 이국땅에서도 한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사는 한국계 외국인들이 많다. 하지만 이들의 정체성 유지 노력에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가.

스트릭랜드 의원은 한복은 우리의 정체성을 어디에 두고 어떤 대내외정책을 펴나가야 할지를 새롭게 환기시켜 준다. 한국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애족애민(愛族愛民)의 문화와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한민족이다. 어디에 사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피부색도 중요하지 않다. 열린 마음으로 공간적, 인종적 한계를 극복할 때 더 큰 한민족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고, 더 큰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잘못된 행동을 민족이란 이유로 눈 감아도 안 된다. 남북관계에 지나치게 함몰된 정부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의 폭파나 우리 공무원 사살사건에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다. 나름 민족주의적 예외나 배려가 작용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우리의 생명이나 재산에 대한 공격은 민족 정체성 차원의 일이 아니기에 예외적으로 다룰 일이 아니다. 왜곡된 정체성 인식에서 잘못된 정책이 싹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IT의 시대, 인터넷 매체와 SNS가 넘쳐나고 있다. 국경 개념은 허물어지고 있고, 민족의 개념 역시 약해지고 있다. 하지만 변할수록 정체성 유지가 중요하다. 그래야 국정의 중심이 잡히고 올바른 정책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새해 첫머리 미국발 사진 한 장이 울림이 있는 이유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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