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남아있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그 원형인 독일의 네오 바로크 스타일과 닮았으면서도 무엇인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건립시기 격차와 함께 그러한 원인들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연면적 3만 1798㎡(9619평), 지상 5층 규모 업무시설인 조선총독부 청사는 `日`자형 평면으로 설계됐다. 日자형 평면은 채광과 환기의 효율성을 고려해 중정을 설치한, 당시 서구 대형 건축물의 전형적인 평면 형태였다. 내부에 사용된 대리석은 색상과 문양에 따라 경기도 양평 운악, 황해도 금천 고동, 평안도 순천 자산 등 전국 9 개 지역에서 산출된 것이었고 철물, 가구, 공예품 등은 미국과 유럽의 제품들이었다고 한다. 중앙홀의 남북 벽면에는 선녀 전설을 빌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상징한 서양화가 와다 산조(和田三造)의 벽화 `하고로모(羽衣)`로 장식했다. 주목할 것은 형식적으로는 서구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실내 공간에 내용적으로는 일본 전래의 신화를 담아 장식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1916년 7월 10일에 착공 후 1926년 1월 4일 완공돼 19년간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됐다. 광복 후 미군정에 의해 캐피탈홀(Capital Hall)로 불리다가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에는 중앙청(中央廳)이라는 이름으로 34년간 정부청사로 사용됐다. 이후 1986년 8월 21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관, 사용되다가 논란 끝에 1995년 8월 15일 돔 상부 랜턴의 해체를 시작으로 1996년 11월 13일 완전히 철거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도 30대 중반 이상 연령의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서울의 대표적 랜드마크 중 하나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사실 건축물 자체로서는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보존론, 철거론, 이전론 등의 많은 논란 끝에 결국 철거에 이른 원인 중 가장 큰 것은 건물의 위치였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일제의 정략적 판단에 의해 결정된 청사 부지는 경복궁의 외조(外朝)에 해당하는 흥례문 권역인데 조선의 수도 한성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던 육조 거리의 정점에 총독부 청사를 세움으로서 조선인의 문화적·역사적·민족적 자아를 심리적으로 압도하고자 한 의도의 결과였다. 구 조선총독부 청사를 돌아보며 새삼 건축의 유한성을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공력을 기울여 지은 건축물이라도 부적절한 의도와 부적절한 위치는 존재의 영속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건축을 계획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명제라고 생각한다. 한동욱(남서울대 교수·㈔충남도시건축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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